[애니스토리](54)인류 보편정신 담긴 `고전` 통해 새 콘텐트 발굴

 솔직히 고백하건대, 최근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임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필자뿐만 아니라 방송사에서 애니메이션을 담당하는 프로듀서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이 ‘미래 고부가가치 콘텐츠 산업의 총아’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이때에 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들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눈치밥을 먹고 살까.

 바로 경쟁력 때문이다. 시장 상황의 변화에 걸맞게 애니메이션 산업을 선도해나 갈 경쟁력있는 콘텐츠가 부재한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창작 애니메이션에 있어 이를 향유하는 시청자와 관객들이 많이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지난해 세계적인 권위의 안시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은 ‘마리 이야기’조차 흥행부진을 면치 못했다. 최근 TV에서도 시청률 10%를 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스로마신화-올림포스 가디언’은 이처럼 외면받는 우리 창작 애니메이션이 처한 냉엄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 출발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국내 시장을 내어 주고 ‘머리는 없고, 몸만 있다’ ‘움직임은 있되 워킹이 없고, 색은 있되 컬러가 없다’ 같은 온갖 자조 섞인 패배주의 속에 마냥 빠져들어 있을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과연 우리가 무엇을 잘 할 수 있고 어디에 집중하고 힘을 쏟아야 할 것인지 냉철하고도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여러 면에서 아직 우리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기획·홍보, 방송·제작, 그리고 사업 등 각 영역에서 시스템을 개선해 핵심 역량을 결집시킨다면 애니메이션 성공의 필요 충분조건에 다가갈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의 밑바탕에는 무엇보다 출판된 지 1년만에 300만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은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원작의 성공이 있었다.

 흔히, 고전엔 향기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결코 훼손되지 않을 인류 보편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신화도 한낱 화석화된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삶에 좌표가 될 무수한 경구와 잠언으로 가득한 보고(寶庫)다. 무슨 몬스터나 로봇들이 판치는 아이들의 세상 속에서 신화 신드롬이 생겼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침이 되는 고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미다스의 허황한 욕심과 이카로스의 교만, 오디세우스의 모험심과 헤라클레스의 용기.

 그리스로마신화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원작 출판물의 검증된 작품성과 흥행성을 바탕으로 방송을 통해 시너지를 극대화시키고, ‘책’ 속의 수려하지만 평면적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영상’ 속에서 한 단계 발전시켜 보다 화려하고 입체적으로 살아 숨쉬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 컨소시엄에 참여한 각 업체들이 저마다의 노하우와 특장점을 살리는 이른바, 제작위원회를 통한 효율적인 역할분담이 이뤄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모두가 공감을 했다.

 제작진들은 새록새록 솟아나는 새로운 재미와 교양, 덧붙여서 어린이들이 마음껏 환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팬터지와 신비감을 불어 넣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지금까지 100여 차례가 넘는 아이디어와 컨셉트, 캐릭터와 디자인 등 온갖 이름의 기획 회의로 전 스태프들은 밤을 새워 왔다.

 또 작품의 모체가 되는 원전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고증 자료의 발굴 작업과 신화의 복잡한 설정을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 가기 위한 노력을 신탁(神托)으로 소명받은 이들처럼 열심히 해왔다.

 출판에서 비롯된 콘텐츠의 강점과 신화 신드롬을 이어가기 위해 스태프들은 자청해서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내했다. 만화주제가에 대한 가요계의 징크스를 물리치고 god도 동참했다. 우리가 그린 그림들이 생명을 얻어 살아 숨쉬는 신화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김재영 SBS PD pico@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