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8)아주 오래된 연인

 1999년 6월 5일, 도쿄 긴시초 스낵바 무네(峰).

 막판에 구슬이 터져 바구니 3만5000엔을 따서 무네의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선 것은 여덟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무네는 말이 좋아 스낵바이지 L자로 생긴 카운터에 의자가 10개 정도 놓여있고 그 안에서 히로코가 혼자 가벼운 요리를 해서 내는 작은 술집이다. 상인들의 왕래가 많은 긴시초역이기는 하나 뒷골목에 들어 앉아서 손님이 북적거리는 편은 아니다. 8시에서 새벽 1시까지의 영업시간에 히로코가 계속 바쁠 정도는 된다.

 “어서 오세요.”

 에이지가 들어서니 히로코가 반색을 하며 반긴다. 이미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있던 늙은이가 히로코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질투인지 도끼눈으로 에이지의 위아래를 훑으며 술을 들이킨다. 이미 히로코를 상대로 수작깨나 부린 분위기다.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어… 그저 궁금해서.”

 그러고보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네에 온 기억이 없다. 언제나 회사 동료들과 한잔 하고 외로울 때면 자정이 가까워서야 오곤 했던 것이다.

 “배고픈데 뭐 맛있는 것 없을까?”

 “싱싱한 장어가 있는데 덮밥 해드릴까요?”

 “그거 좋지. 그런데 그거 먹고 정력이 일어나면 책임지는 사람 있나?”

 이 말에 늙은 손님이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어이 마담. 가라오케 좀 넣어봐.”

 얼굴을 보니 위아래보다 좌우의 길이가 길 정도로 퍼지고 콧구멍 속이 훤하게 보여 상스럽기 그지없다.

 열평이 채 안되는 좁디 좁은 스낵바에서 천장 구석에 걸린 작은 모니터를 보며 의자에 앉은 채로 부르는 시끄러운 노래에 아무말도 못하겠다.

 히로코는 그래도 초급대학을 나오고 가난하지만 기품이 전혀 없는 여자는 아닌데 이런 상스러운 손님을 상대로 푼돈 장사를 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 내가 왜 진작 돈을 좀 펑펑 벌지 못했을까? 히로코에 대한 연민이 자신의 질책으로 바뀌며 에이지는 맥주를 연신 들이킨다. 장어덮밥이 나오자 오랜만에 일본의 최고급 위스키 히비키를 한병 시킨다.

 “어머, 오늘 좀 쓰네요?”

 “어, 파칭코에서 3만엔 넘게 땄거든.”

 “그 파칭코 어디요?” 노래를 두곡 마친 늙은이가 끼어든다.

 장어덮밥을 볼이 터지게 넣고 씹으며 에이지는 대꾸는커녕 눈길도 안준다.

 비교적 귀티가 나게 생기고 넥타이를 맨 에이지가 히비키를 시켜 마시는 것을 보며 늙은이는 야코가 죽었는지 말도 없이 돈 2000엔을 카운터에 위에 놓고 “잘먹었네”하며 나간다.

 “저 늙은이 자주 오나?”

 “가끔. 역 뒤에서 열쇠점을 하는 아저씨인데 혼자 살아요. 왜,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그 늙은이 꼭 가오리같은 것이 장어덮밥 맛 버렸네.”

 “남자들이란 나이를 먹어도 애들이라니까”하며 히로코가 웃는다. 그래도 마음속은 에이지의 애정이 느껴져 뿌듯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정말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사연이 많아, 오늘은.”

 “어머, 좋아라. 오늘은 밤새워 이야기하게 생겼네.”

 “그래 볼까?” 이 간단한 대화에 둘은 은근히 몸이 달아오른다.

 위스키잔의 얼음을 돌려 녹이며 에이지가 묻는다.

 “히로코상, 내 친구 후지사와 아키라라고 알던가?”

 “후지사와… 아, 그 말 없고 잘생긴 사람 말이죠. 두번인가 같이 오신 것 같아요. 상당히 오래 전이긴 하지만.”

 “그 친구, 죽었어.”

 “네?” 히로코가 수돗물을 잠그며 일순 동작을 멈춘다.

 “아니, 어떻게요?”

 “회사 옥상에서 투신했어.”

 히로코가 허리를 펴고 카운터 안쪽에서 담배를 하나 피워 문다.

 둘은 담배만 태울 뿐 한동안 말이 없다.

 “사실 저는 그 사람 보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뭐라고?” 에이지는 히로코의 말에 순간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움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그 사람 우리 가게에 왔던 것이 10년도 더 된 것 같은데요.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눈을 보고 있자면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어딘가 헤매고 있는 듯하고… 말씨는 따뜻하지만 눈길은 차갑기 그지 없었지요.”

 “허… 그래?” 에이지는 히로코의 감수성에 놀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하며 에이지는 히로코의 말을 재촉한다.

 “제가 ‘후지사와상은 눈이 매섭내요’라고 하니까 ‘사람을 죽여 본 이는 이런 눈을 하고 있다더군요’라고 한 기억이 나네요.”

 “그게 언제쯤이야?” 에이지가 술이 싹 깨며 묻는다.

 “글쎄… 한국에서 올림픽을 하던 무렵이니까 1988년 쯤인가요.”

 “음…” 에이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1999년 6월 5일, 기타우에노(北上野) 히로코의 아파트.

 격렬한 정사가 끝난 후 에이지는 팔베개를 하고 한손을 히로코의 젖가슴에 얹은 채 말을 건넨다.

 “나, 회사 그만둘까 해.”

 “오늘은 정말 빅뉴스의 연속이네요.” 히로코는 크게 놀라지 않는 기색이다.

 “별로 놀랍지 않은 모양이지?”

 “당신, 회사 재미없다고 한 게 어제 오늘이에요? 그만두고 무얼 하실 작정이에요?”

 “실은 말이야, 후지사와군의 자살 내력을 밝혀볼까 해. 그 친구가 죽기 직전에 내게 소년시절부터의 일기를 맡겼는데 아무래도 여러가지 알아봐야 할 것 같고… 시간이 상당히 걸릴 수도 있어.”

 히로코가 몸을 모로 돌리며 쳐다본다. 40의 나이라고는 하나 아직 풍요한 젖가슴이 몸을 돌리자 제 무게에 흔들린다.

 “나도 같이 하면 안될까요?”

 “무얼?”

 “자살의 미스터리를 푸는 일.”

 “정말이야? 그건 좋은 일이지만 가게는?”

 “당신이 퇴직금으로 먹여 살리겠지.”

 “좋아. 좋은 생각이야”

 “실은, 나도 이 장사 더 이상 하기 싫어요.”

 “그래… 그럼 그만두자. 나하고 여행이나 다니며 친구의 내력이나 캐보지.”

 “알았어요”하며 히로코가 팔을 감아온다.

 둘이 젊었을 때 만났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편했을까 생각하며 에이지는 다시 히로코의 몸을 탐한다.

 새로운 출발이다. 우연한 시간에 우연한 장소에서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하며 히로코의 몸안으로 들어가는 에이지의 마음은 오랜만에 니르바나를 느낀다.

 

 1999년 6월 6일, JTT 본사.

 안개인지 비인지 모를 습기가 공기를 꽉 메운 아침, 에이지는 출근하여 e메일을 확인한다. 스즈키가 보내온 e메일은 아키라의 본적 주소를 효고(兵庫)현 아시야(芦屋)시로 기록하고 있다. 아시야시라면 오사카·고베지역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유명한데…. 아키라는 역시 부잣집 아들이었던가?

 “어이, 들어오게. 자네 요새 보기 힘들구만.” 사람 좋은 고이즈미는 만면에 띄운 웃음으로 반긴다. 후지사와의 자살로 인한 회사내의 충격도 다소 가라앉은 터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저, 사실은 사직서를 낼 계획입니다만, 전무님께 먼저 제 입으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직서? 자네들 요새 사람 놀래키는 데 재주가 있구만. 사직은 웬 사직이야.” 나무라는 말투지만 놀라는 기색은 별로 없다.

 “전무님이 아시다시피 제가 중책을 맡은 것도 아니고…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회사에서 할 일이 더 없습니다.”

 “자네 우리 회사에서 몇년 일했나?”

 “1970년에 입사했으니 거의 30년이네요.”

 “우수한 사람인데… JTT는 명색이 통신회사인데 엔지니어는 찬밥이고 문과계 사람들이 틀어쥐고 있으니 참 큰일이야.” 고이즈미는 회사내의 한 병폐를 담담하게 말한다.

 “참 오랜 세월 수고했네. 30년을 같은 솥에서 밥을 먹은 동지들이 영광스럽지 못하게 떠날 때 이 자리에 앉아 비애를 느끼네.”

 “따뜻한 말씀 고맙습니다.” 에이지는 진심으로 말한다.

 “그래,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야?”

 “그게, 실은… 후지사와 아키라군의 자살 내력을 좀 알아볼 생각입니다.”

 “허, 그래?” 고이즈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좌를 하며 에이지를 바라본다.

 “예…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합니다.”

 “흠… 알겠네. 그렇게 해주게. 다만 회사에 누가 되는 식은 안돼. 그리고 내 힘이 필요하면 알려주게나.”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번 댁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잘 가게.”

 진한 아쉬움에 손을 잡는 두사람의 태도가 어색하지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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