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지갑에는 현금이 없다.’ 요즘 일본인들의 지갑을 보면 지폐나 동전보다는 각종 카드가 즐비하게 꽂혀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자기가 먹은 음식은 1엔이라도 반드시 본인이 부담한다는 ‘와리캉 문화’ 때문인지 한국과는 달리 아직도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음식점들이 많으며, 현금지급기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처럼 철저한 현금주의자들로 불리는 일본인들도 서서히 편리한 카드 사용에 익숙해 지고 있다. 다음은 일본사회의 ‘카드문화’ 단면들이다.
◇전철패스, 수이카=JR동일본이 발행하는 ‘수이카(Suica)’는 비접촉형 IC카드 전철패스로 도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활필수품. 수이카는 영어로 ‘Super Urban Intelligent Card’라는 의미로 일본말로는 ‘슬슬 거리낌없이 지나가는 카드’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정기권’과 ‘이오카드’ 두 종류가 있는 수이카는 충전식이기 때문에 혼잡한 전철역에서 표를 굳이 매일 살 필요도 없으며 케이스에 꽂은 채 개찰구에 살짝 대기만 하는 ‘터치앤고(Touch and Go)’식 승차권이다. 뿐만 아니라 사철(私鐵)이나 정해진 구간을 벗어나더라도 번거롭게 별도 정산기를 거치지 않고도 개찰구에서 자동으로 정산된다. 충전이 다되면 구입이력이 남아 있어 재등록 절차 없이 바로 재충전 가능하다. 이러한 편리함 때문에 현재 수이카 이용자는 570만명을 넘어섰다.
앞으로는 이러한 수이카의 기능이 더욱 개선될 전망이다. 정확히 신용카드 크기인 수이카에 전자화폐 기능을 추가시킨다고 JR동일본측이 4일 발표했기 때문. 새 카드는 ‘뷰수이카(View Suica)’로 불리며 충전 금액만큼 물품구입이 가능하게 된다. 먼저 오는 6월경 역 주변 가맹점에 시범적으로 설치된 후 이르면 2004년 봄부터 일반화될 예정이다.
◇신용카드 이용식 주차장=오는 2004년부터 신용카드로 모든 것이 관리 및 통용되는 ‘캐시리스(cashless)’ 주차장이 스미토모상사에 의해 일본전역에 100개소 이상 설치될 예정이다.
귀찮게 주차표를 끊고 현금을 지불하는 일이 없어져 전체 관리비용이 일반 주차장에 비해 거의 30%나 줄어들고, 또 정산기의 구조도 간단해질 전망이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보안체계도 안전한 데다가 기존의 30분 단위 과금체계에 비해 신용카드식 주차장은 1분 혹은 1엔 단위까지 세밀하게 관리돼 이용자들에게 바가지 요금을 씌우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전자증명서 개발 한창=주민증이다 운전면허증이다 해서 여러개씩 가지고 다녔던 각종 신분증이 사라지고 ‘전자증명서(일명 디지털 증명서)’로 대체될 날도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인증국(CA)이라 불리는 제3자에 의한 간단한 인증절차로 발급되는 전자증명서에는 개인의 신상명세는 물론 은행 신용정보까지 모두 포함되며 가까운 미래에는 심지어 전자여권 기능까지 통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일본인쇄는 ‘DNP Standard-9 ADVANCE-FP’라는 전자인증용 IC카드를 개발, 오는 8월부터 시판에 들어간다. 이 카드에는 개인마다 다른 지문을 인식할 수 있는 칩이 내장되어 있어 본인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데 전용장치로 1초 이내에 지문을 읽은 다음 카드에 기억된 정보와 일치할 경우만 한해서 전자증명이 인정되는 고정밀 인증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대면이 불가능해 항상 불신의 소지가 남는 전자상거래상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토판(TOPPAN) 인쇄는 회사를 상대로 IC카드 형식의 전자증명서 발행대행 업무를 4월부터 본격화할 예정이다. 사원 1만명 이상의 회사인 경우 자체 인증시스템을 갖추는 것보다 이러한 인증국에 위탁할 경우 소요경비가 기존에 비해 10분의 1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고 토판은 말하고 있다.
일본 총무성은 이와 같은 전자인증 비즈니스 시장이 향후 5년내에 현재 규모보다 적어도 6배 이상은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때마침 ‘IC CARD WORLD 2003’이라는 대형 행사가 니혼게이자이신문 주최로 4일부터 7일까지 도쿄에서 개최돼 최첨단 IC카드 기술과 카드 이용시스템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 행사에서는 특히 전자화폐용 IC카드에 표시장치를 탑제한 토판인쇄의 차세대형 카드가 눈길을 끌었으며 실제로 행사장 내에서 전자화폐 ‘에디(Edy)’를 일반인들에게 무료 체험케 하는 코너도 마련되는 등 이번 행사로 일본내 IC카드 이용이 성큼 더 현실로 다가오는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