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IT업체들이 ‘한국의 벤처 및 IT산업과의 동반성장’을 모토로 내걸고 추진해온 각종 투자 및 지원 프로그램들이 올들어 대폭 축소되거나 가동중단되는 등 명목상의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옛 한국HP, 옛 컴팩코리아,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등 다국적 IT기업들은 지난 2000년부터 자체 또는 국내 벤처캐피털 및 인큐베이팅 전문업체들과 손잡고 다양한 벤처지원 프로그램을 쏟아냈지만 올들어 투자축소는 물론 후속 사업계획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다국적 IT기업의 글로벌 영업망과 인지도, 자금력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꿔온 국내 벤처기업들이 이들 IT업체의 일시적인 마케팅 전략에 도구로 이용된 것 아니냐는 비판마저 제기되고 있다.
한국HP와 인텔코리아는 지난 2000년부터 벤처 인큐베이팅 업체인 사이버펄스네트워크(CPN)와 공동으로 추진해온 벤처 투자 및 육성 프로그램인 ‘키비(KIVI)’ 사업에 올해부터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MS를 포함한 3개 다국적 업체와 CPN이 손잡고 유망 벤처를 발굴해 자금 및 현물 출자와 국내외 마케팅 지원에 나서온 이 프로그램이 사업 4년째를 맞는 올해에는 MS만 그나마 부분적으로 참여해 초기 사업취지가 크게 퇴색되고 있다.
또 통합HP가 출범하면서 그동안 옛 한국HP와 컴팩코리아가 별도로 추진해온 벤처육성 프로그램도 조직 및 사업정비 과정에서 투자부문이 대폭 축소됐다. 컴팩시절 e코리아에서 국내 기업에 투자키로 해 관심을 모았던 1억달러의 재원은 본사 차원에서 모두 흡수된 뒤 ESG마케팅 산하 기업전략 사업부에서 부분적인 투자를 조율하기로 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투자근거나 관련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HP와 SK텔레콤이 지난 2001년 12월 각각 500만달러씩 1000만달러 규모로 결성한 조인트벤처펀드도 조성 1년이 지난 3월 현재까지 한건의 투자도 이뤄지기 않았다. 또 컴팩코리아가 벤처 투자 및 지원 프로그램으로 진행해온 ‘e코리아 프로그램’은 한국HP로 통합되면서 ‘개러지 프로그램(장비 무상임대 제도)’ ‘ESPP(비즈니스 파트너 지원)’ 등 협력업체의 마케팅지원 프로그램으로 축소돼 제한적인 기능만 수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HP의 한 관계자는 “합병 과정에서 옛 컴팩이 발표한 투자재원이 흡수됐지만 대외적으로 전체적인 투자규모를 확정하지 않았을 뿐 벤처지원을 축소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투자부문은 부서별로 추천된 기업에 대해 지사와 본사의 투자평가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사안별로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합병 이전에 투자와 제휴관계를 맺은 기업들의 사후관리와 비즈니스 협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한국오라클(OVN프로그램), 한국썬(이센셜프로그램), 한국CA(조인트벤처 프로그램) 등이 그동안 경쟁적으로 발표했던 벤처투자 계획과 지원 프로그램도 모두 사실상 가동이 중단돼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이정환기자 victo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