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열린 컴덱스 기조연설에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수많은 관람객 앞에 자신이 차고 나온 손목시계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값비싼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액정식 전자시계였지만 세계 IT업계는 일제히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빌 게이츠 회장이 선보인 시계는 단순히 시간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라디오방송국이 보내는 FM전파 속에서 주인이 필요로 하는 인터넷 정보만을 걸러내는 스마트 시계였다. 보통 라디오 방송국이 사용하는 FM주파수에는 다른 방송국들과 혼선을 막기 위해 음성정보가 실리지 않는 여분의 주파수대역이 존재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남은 FM주파수 대역을 이용해 초당 12Kbps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스폿(SPOT:Smart Personal Object Technology)’이란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스폿은 손목시계 등 일상기기에 인터넷 기능을 부여할 수 있는 차세대 개인용 스마트기술로 구형 전화모뎀보다 전송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동영상 전송은 무리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자정보를 전송하기엔 충분하다. 내일의 날씨를 알아보는데 반드시 동영상 메일로 비가 오는 장면을 봐야할 필요는 없다. 그저 ‘비가 온다’는 문자메시지면 충분하다.
“오후 3시 약속장소 마포로 바꿨어요.”
“마포대교 상행선 사고로 정체.’
“박찬호 3대 0으로 완봉.”
“주가 15포인트 상승.”
사용자는 스폿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이 받을 e메일이나 뉴스, 스포츠게임, 날씨, 교통, 주식 및 기타 개인정보를 미리 선택할 수 있다. 암호화된 고유코드가 저장된 시계는 FM전파에 실려오는 데이터 중에서 주인이 받을 사적인 문자메시지나 생활정보만을 검색해 LCD화면에 띄워준다. 스폿기능이 부여된 스마트시계를 차는 것만으로 라디오전파가 수신되는 지역 어디서나 일상에 필요한 정보검색이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스마트시계는 항상 FM전파에 따라 초단위로 맞춰지기 때문에 평생 시침을 별도로 조정할 필요가 없다. 기계적 정밀성에 상관없이 모든 스폿시계는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더욱이 FM전파에서 각종 정보를 걸러내는 스폿모듈은 크기가 매우 작고 전력소모량도 미미하다. 따라서 손목시계나 열쇠고리, 만년필 같은 조그만 개인용품 어디에나 쉽게 내장되고 냉장고, 오디오, 주방기기 같은 실내용품에 장착하기도 쉽다.
더욱이 스폿모듈은 기본적으로 흔한 FM수신기에 디코더칩을 내장하기 때문에 제조원가도 저렴하다. 데이터전송은 기존 FM방송망을 이용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통신설비투자도 필요없다. 아프가니스탄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도 자체 라디오 방송국만 있다면 스폿기반의 정보서비스를 어렵지 않게 구현할 수 있다.
마이로소프트는 스폿서비스를 위해 이미 미국 전역의 FM라디오 방송국들과 주파수 임대계약을 체결했으며 현재 전국토의 80%를 서비스영역으로 포함시킨 상태다.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에 손쉽게 접속하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실제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계제조업체들도 올 가을부터 스폿기반의 스마트 손목시계를 출시하고 머지않아 변기에서 옷걸이, 식탁, 안경 등 온갖 생활용품에 스폿기술이 접목될 전망이다. 라디오 방송망을 이용한 스폿서비스는 어떤 정보통신기술보다 투자대비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에 수년내에 미국 외에 아시아, 유럽국가로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 특히 한국의 광적인 인터넷열기를 감안할 때 라디오 전파로 언제 어디서나 저렴하게 인터넷정보를 검색하는 스폿서비스의 도입은 사실상 시간문제다.
이제 사우나를 하든 운동을 하든 손목시계만 차면 전세계 컴퓨터 자료를 자유로이 뒤적일 수 있는 유비쿼터스 세상이 실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 배경에는 뜻밖에 지난 한세기 동안 우리 생활 속에 너무도 친숙해진 아날로그 라디오가 자리잡고 있다.
스폿의 등장과 함께 라디오가 첨단 유비쿼터스 세상을 구현하는 새로운 매체로 조명받고 있다. 지구상에 가장 대중화된 라디오 방송망을 활용하면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일상주변의 사물에 정보기능을 부여하는 유비쿼터스 통신환경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휴대폰 통화가 안되는 지역은 아직 수없이 많다. 그러나 히말라야 정상에서 남극, 태평양의 외딴 섬까지 라디오 수신이 불가능한 지역은 거의 없다. 수많은 라디오 방송국이 발신하는 전파망이 지구표면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디오 전파에 개인화된 인터넷 정보를 얹어서 보낼 수 있다면 엄청난 비용을 들여 별도 통신망을 구축하지 않고도 유비쿼터스환경을 쉽게 구축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과거 80년전 라디오를 처음 접했을 때 꿈꾸던 무선기술의 낙원보다 훨씬 앞선 세상을 살고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교훈대로 지난 세기 라디오가 우리 일상 속에 대중화된 과정을 뒤돌아보면 앞으로 펼쳐질 유비쿼터스 세상이 어떻게 다가올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생활주변의 모든 사물에 통신기능을 부여하는 유비쿼터스 세상은 이제 꿈이 아닌 현실이다.
팀장 : 주상돈기자 sdjoo@etnews.co.kr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임동식기자 dslim@etnews.co.kr
김규태기자 star@etnews.co.kr
조윤아기자 forange@etnews.co.kr
성호철기자 hcsung@etnews.co.kr
<박스1>라디오의 역사
라디오는 가장 오래되고 대중적인 전파매체다. 우리나라에서 라디오 전파가 방송되기 시작된 것은 지난 1926년 경성방송국이 개국하면서부터다. 전파가 닿는 곳 어디서나 청취가능한 라디오의 출현은 당시로선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요 정보 혁명이었다.
“라디오만 갖고 있으면 지구 건너편의 세상소식도 바로 알 수 있다더라.”
사람들은 안방에서 손쉽게 정보를 제공하는 라디오를 접하면서 마치 공기처럼 세상을 뒤덮는 전파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대중은 이런 추세로 전파기술이 발전하면 언젠가 통신선이 없어도 사람끼리 빛의 속도로 대화를 나누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어렴풋이 현재의 무선통신시대를 머리 속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라디오의 대량보급은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도 지난 59년 금성사가 최초로 국산 라디오를 만든 이후 6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라디오 대중화시대가 열렸다. 또 큼직한 진공관 소자가 트랜지스터로 대체되면서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초소형 라디오가 등장했다. 거리를 활보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포터블 라디오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노트북PC만큼이나 갖고 싶은 최첨단 정보매체였다. 수신기가격도 매년 떨어져 도입초기 집 한 채와 맞먹는 귀중품이던 라디오는 학생에게 입학선물로 줄 정도로 흔해졌다.
지금은 교통·뉴스·날씨·증권 등 문자정보를 서비스하는 FM부가방송(DARC:Data Radio Channel)이 생활 속에 보급되면서 눈으로 보는 라디오 시대가 열렸다. 실제로 MBC는 FM주파수의 여유분에 디지털 문자정보를 함께 전송하는 ‘아이디오’ FM부가방송을 전국에 서비스중이다. DARC는 특히 실시간 교통정보를 전달하는데 적합해 지금까지 6000여대의 DARC수신기가 운전자층에 보급됐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라디오는 비록 70년대 이후 TV에 주도권을 뺏겼지만 1인당 보급률이 가장 높고 대중화된 정보미디어로 자리잡고 있다. 이 땅에 라디오가 처음 도입된지 불과 40여년만에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방송망에 접근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방송환경이 구현된 것이다.
<인터뷰>MBC기술연구소의 전우성 소장
MBC기술연구소의 전우성 소장(49)은 국내서 손꼽히는 방송기술 전문가다. 그는 22년간 방송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HD TV와 위성방송, 디지털지상파 등 차세대 방송분야를 담당해왔지만 아날로그 라디오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앞으로 라디오 매체의 미래를 전망한다면.
▲지금까지 라디오방송은 음성위주 서비스를 해왔지만 앞으론 교통정보나 뉴스, 기상 등 정보데이터 방송매체로 발전할 겁니다. 당장 올하반기부터 방대한 데이터 전송능력을 지닌 디지털 라디오가 수도권에서 실용화됩니다. 속도는 좀 느리지만 아날로그 FM라디오도 데이터전송이 가능하지요.
―최근 FM라디오를 이용한 정보서비스가 유비쿼터스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데.
▲라디오매체는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유비쿼터스 통신환경을 구현하는데 최적의 도구입니다. 전국에 깔린 FM 방송망을 그대로 이용하고 수신기도 저렴합니다. MBC는 이미 DARC라는 FM 데이터방송을 서비스중입니다. 스폿처럼 개인화된 데이터전송은 안되지만 대중에게 교통, 뉴스, 기상정보 등을 저렴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익적 가치는 뛰어납니다. 미국에서 스폿서비스가 성공할 경우 국내서도 FM기반 데이터서비스가 더욱 확산될 것입니다.
―아날로그 라디오가 언제까지 생명력을 지닐까요.
▲방송도 시대에 맞춰 바뀌겠지만 라디오가 지닌 폭넓은 청취층과 저렴한 수신장비의 이점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방송은 통신기술과 달리 수익성보다 공익성이 우선이니까요. 디지털 라디오가 실용화돼도 아날로그 라디오는 향후 30년간은 가장 대중적인 정보매체로 살아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