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6일, 아시야 역전 후지부동산.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에이지가 부동산 바깥 노인네한테 묻자 긴장이 풀린 노인은 “도조 (어서)”하며 자리를 권한다.
“어이, 오차(茶)”하며 바깥 노인네가 부인에게 오차를 가져오라 한다.
“좀 정리해서 말씀을 드려야겠는데요”하며 에이지가 말투를 공손히 하자 바깥 노인네는 야 이거 심심한데 잘됐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후지사와 댁에 아키라라고 아드님이 있는데 사실 그가 제 친구입니다.”
“아키라군을 알아요?”
“네.”
“허어…” 노인은 에이지가 아키라의 친구라는 것이 큰 발견이라도 되는 양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아키라군은 도쿄의 고교에 진학할 때까지 매일 이 앞으로 지나다니며 인사도 잘했었지. 참 번듯한 인재구먼… 최근에 어떻게 지내는고?”
“모르셨습니까?”
“뭐를?”
“아키라군은 죽었습니다”
이 때 마침 쟁반에 일본차 네잔을 받쳐 오던 여자 노인네는 또 한번 놀라 오차를 엎지른다.
“아니 어떻게?”
에이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두 노인네는 제 자식이라도 잃은 양 힘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후지사와댁을 잘 아는 모양이죠?”
“아 그거야, 이 동네 후나토초(町)나 오하라초(町) 사람들은 후지사와댁에 신세 한번 안진 사람이 없다고 봐야겠지.”
“저는 사실 통 모르겠는데, 후지사와댁이 무슨 큰 권력이라도…”
“방금 아키라군과 친구라고 해놓고 아무 것도 모른단 말인가?”
“네, 대학동기이고 JTT 입사동기입니다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로 한 기억이 없는데요…”
“음, 그래…”
이 대목에서 노인네의 말투와 분위기가 바뀐다. 찬찬히 보니 돋보기에 확대된 눈알이 왕사탕만하고 얼굴에 홍조가 돌아 소년같은 느낌이 든다. 여자 노인네는 옆에서 눈을 아래로 착 깔고 젖은 수건으로 테이블만 살살 닦는다. 말하기 힘든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아키라군이 세상을 뜨기 전에 제게 일기를 다 주고 갔는데 친구로서 죽음의 내력을 이해해달라는 뜻 같아서…”라며 에이지가 침묵을 깨자 노인네가 목의 가래를 한참 다듬어내더니 결심한 듯 말을 한다.
“두분이 모두 인상이 좋고 아키라의 친구라니 믿고 말을 하리다. 후지사와 가문이 원래 조센진이라는 것은 이 일대에 오래 산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오.”
“네에?” 에이지와 히로코 모두 놀라움에 낮은 비명을 낸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의 말은 계속된다.
“후지사와 히로시상, 그러니까 아키라군의 할아버지는 원래 사카이에 살다가 이곳으로 온 것으로 들었소. 이 지역에 나보다 먼저 왔으니 연도는 알 수가 없고…. 참으로 좋은 분이었지. 재산가였고. 사카이에서 큰 제조업을 하셨다는 말은 들었소.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 아마 아키라군이 도쿄의 고교로 진학하기 전일 거야.”
“문제는 그 아들 데츠로상이었지… 사나이 중의 사나이고 인물이 뛰어났는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라고 에이지가 끼어든다.
“그러니까 그게… 데츠로상은 야마이치구미(山一組)의 고베 조장이었거든.”
“네?” 이 말에 에이지와 히로코는 숨을 들이키며 경악을 한다.
야마이치구미라면 일본 최강의 폭력배조직이 아닌가? 더구나 거기서도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베의 조장이었다니. 그 지성적이고 젠틀한 아키라의 부친이 일본 최고의 깡패였단 말인가?
주인한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담배를 피워 문 에이지는 한대를 다 피우도록 말을 못한다. 다른 세 사람도 에이지의 담배향기를 감상하듯 조용하다.
“그러면 아키라군의 모친은 어디 계십니까?” 담배를 재털이에 부며 끄며 에이지가 묻는다.
“수년 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지요.” 이번에는 여자 노인네가 대답한다. “95년에 대지진이 오기 직전부터에요. 도쿄 기요세에 있는 결핵병원이라고 들었는데…”
“결핵이오?”
“결핵뿐만이 아니라 정신이상도 있다고 들었어요. 대단한 미모에다 음악도였었는데. 나도 전부터 후지사와 부인을 아는 사이인데 청순한 사람이 갑자기 타락하듯 변했어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여자 노인네는 조용하면서도 설득력있게 말을 한다.
“그렇군요… ”하고 에이지가 말을 받아도 더 이상 나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하고 일어서 나오다 뒤돌아서 에이지가 묻는다.
“아까는 왜그렇게 놀라셨지요?”
“후지사와 가문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극도(極道)의 사람들이지요.”
극도란 야쿠자계를 점잖게 칭하는 말이다.
1999년 6월 7일, 로코산(六甲山) 텐구진자(天狗神社).
텐구진자로 들어가는 도리이(鳥居:일본신사의 대문)를 지나자 오전의 태양이 밝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할 정도로 나무와 숲이 우거진 언덕길이 이어진다. 아직 6월 초인데 고베만 해도 남쪽이라 그런지 여름 들꽃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들고 있다. 목이 긴 괭이밥, 노란 꽃을 소복하게 피워댄 조밥나물 사이를 골풀이 메우고 있다. 여기는 내땅이라고 불러대는 새들의 노래가 공기의 청량함을 일깨워준다.
어제 도쿄에서부터 강행군을 한데다 워낙 충격적인 얘기들을 많이 들어서 에이지와 히로코는 아시야역 부근의 여관에 들어가 일찍 녹아떨어졌다. 객지지만 모처럼 푹 자고 아시야 시청의 혼다가 일러준 텐구진자의 간누시(神主:주지와 같음) 히구라시를 만나러 나선 길이다.
언덕을 다 올라서자 평지가 확 트이며 또 하나의 도리이가 눈에 들어온다. 도리이를 두개 세웠다는 것은 제법 규모있는 신사임을 말한다. 두번째의 도리이를 지나자 보도 블록이 잘 깔린 큰길이 본전(本殿)이 정면에 보이도록 닦여있고 양 가장자리에는 붉은색 지붕을 씌운 작은 등탑들이 정렬되어 있다. 본전의 입구 기둥이며 처마가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 산속의 신사치고 화려하다.
본전의 왼쪽으로 사당이 두어채 있고 오른쪽에 유리문이 달린 가건물이 있어 사무실임을 알 수 있다. 사무실 문을 여니 붉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미코(巫女:신사의 여자 조수)가 책상에 앉아있다.
“실례합니다. 히구라시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혼례인가요? 아니면 특별한 상담이라도…?”
“실은 후지사와댁의 건으로 말씀 좀 여쭙고자 합니다만…”
후지사와라는 이름에 미코의 눈이 커지며 태도가 더 공손해진다.
“간누시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본당에 가서 앉아 계십시오.”
본당에 들어서니 밖의 화려함과는 달리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다. 윤기가 도는 나무바닥에 앉으니 냉기가 치밀어오르고 유월의 더위가 싹 가신다. 본당 안을 둘러봐도 무슨 신을 모시는지 금방 알 수가 없다. 일본의 신사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를 숭배하는 것이고 동시에 모시는 신이 팔백만 종류가 넘는다고 하니 알기 힘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히로코와 둘이 앉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한쪽 문이 열리더니 흰색 장삼을 입은 이가 들어선다. 한눈에 봐도 180㎝는 되어 보이는 장신에 검도라도 했는지 단단한 부지깽이같다. 얼굴도 길고 두개골은 뾰죽한데 번쩍이도록 베코를 쳐놓았다. 힘센 장사가 들어 던지면 나무기둥에 창같이 꽂혀 부르르 떨릴 법한 체형이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두사람 앞에 앉더니 가부좌를 틀고 지긋이 눈을 감는다. 정좌를 한 후 이윽고 “히구라시라 합니다. 후지사와댁의 일이라 하니 무슨 일이시오. 보아하니 후지사와 가문의 피를 받은 사람들같지는 않은데…”한다. 그 목소리가 낮고 가벼운 쇳소리가 있는데다 씩씩 바람이 새는 것 같아 몸안에 기운이 꽉 차 있는 느낌이다.
에이지는 괜히 야코가 팍 죽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이런 때는 여자가 더 낫지라는 식으로 히로코가 나서서 “실은 후지사와 아키라라고, 저희의 지인이 세상을 뜨셔서…”라고 한다.
이 말에 히구라시가 “나니(뭐)?”하며 힘주어 말하고 눈을 번쩍 뜨는데 눈이 크다기보다는 눈동자가 팍 튀어나오고 물기가 유난히 번쩍거려 기묘하게 무섭고 잔인하게 보인다. 뜬 눈을 양쪽으로 데굴데굴 굴리며 에이지와 히로코를 번갈아 쳐다보는데 눈동자가 바닥으로 덱데굴 떨어져 구를 것만 같은 착각을 준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양 무릎에 놓인 손을 폈다 쥐었다 한다. 히구라시의 표정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던 에이지가 숨을 좀 몰아 쉬려고 하는데 히로코가 툭 친다. 히로코의 시선이 가는 데를 따라가 본 에이지는 다시 숨이 막히고 찬 대청마루에 얼어 탱탱해진 방광이 풀리며 오줌이 나오려고 한다. 히구라시의 왼쪽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가 없지 않은가? 그럼 이사람은 야쿠자 출신 승려?
sjroh@alum.mit.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