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익 한국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 hecho@kotef.or.kr
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 세계의 제조업은 일본에 의해 평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산기술과 생산성으로 무장된 막강한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을 기반으로 일본은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이 됐으며 각국에서는 일본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일본의 마키노 노보루란 학자는 ‘제조업은 영원하다’라는 책을 저술해 우리나라 경제계에서도 한때 지침서처럼 된 적이 있다. 그러니 이 책에 따라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일본의 번영은 영구할 것이라는 데 의문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난 현재 일본은 이런 예상과 정반대로 구조적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니·혼다·미쓰비시 등 제조업의 영원한 선두주자로 의심치 않던 기업들이 그 브랜드의 위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이 일본의 자만에서 비롯된 것일까. 또는 제조업 자체의 한계 때문일까.
물론 일본 경제체제의 경직성도 큰 원인이지만 제조업의 개념 자체가 크게 변화했다는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나노기술을 이용해 단춧구멍보다 작은 의료기기가 인체에 들어가서 모든 검사를 다 할 수 있다면 그 의료기기 제조를 제조업으로 봐야 하는가. 바이오기술을 이용한 생명복제도 제조업에 포함시켜야 될 것인가. 가장 전통적인 제조업이라는 조선과 철강산업도 현장에 가보면 정보통신기술과 접목돼 헬멧보다 모니터가 더 눈에 띈다.
제조업과 지식산업, 서비스산업이 융합돼 2.5차 산업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조업의 전통영역이 바뀌고 제조업의 교과서가 바뀔 정도로 빠른 변화의 와중에 제조업 왕국의 왕관을 쓰고 평생고용이라는 시혜적 기업문화 속에서 일본은 그 변화의 속도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리고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한국과 중국이 바로 등 뒤에 쫓아와 있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제조업은 영원한가. 일견 일부 전자나 통신기기 분야에서는 일본을 따라잡았고 주력제조업 분야가 대부분 세계 10위권에 들어 있으며 세계일류상품도 200여개나 된다니까 괜찮은 모양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5년 후에 어떤 제조업 분야가 세계를 주도하고 우리를 계속 먹여 살릴지 하는 그림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미 태반이 넘는 기업이 중국 등 외국으로 공장과 본사를 이전하려고 한다. 주5일제·비정규직·외국인 연수생 등 각종 근로시간과 고용문제에서 이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물 건너 간 것 같다.
이제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에기술력의 어설픈 우위만 갖고는 더이상 경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우리의 제조업은 이 엄청난 속도의 변화 속에서 일본처럼 침잠해 버려야 하나.
그렇다면 총수출에서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은 ‘효율’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본다. 아마도 기업기능을 전문화하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의 수명이 급속히 단축되고 기술과 지식이 융합되는 단계에서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은 지금보다 몸이 가벼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들이 가장 잘하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고 핵심역량이 아닌 분야에 대해서는 적절한 파트너를 구해 협력을 구해야 한다. EMS(Electronic Manufacturing Service)라고 불리는 전자부품위탁생산도 그런 기업기능 전문화의 한 형태다. 대기업들은 설계와 마케팅 등 고부가가치 분야에만 역량을 쏟고 생산분야는 모두 전문생산기업에 이관해 혁신적인 원가절감과 전문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솔렉트론·셀레스티카 등 거대한 계약생산전문기업이 탄생했으며, IBM·시스코·델 등 대기업이 제품생산을 이런 전문기업에 위탁하고 있다. EMS체제는 이제 국경을 넘어 일본·중국·싱가포르·한국에도 파급될 조짐이다. 우리 제조업도 이런 변화에 시급한 대응이 필요하다.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와 관련해 또 하나 필요한 것은 CRO(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로 불리는 연구개발전문기업의 육성이다. 연구개발 전문기업이란 미리 동의한 계약에 따라 연구개발업무를 다른 기업을 위해 대행하는 기업으로 국내 제조업, 특히 중소제조업체들이 크게 관심을 갖는 분야다. 기존 기술력 있는 벤처를 중심으로 연구개발 전문기업을 육성하고 이를 생산전문기업과 연계시킴으로써 제조업의 고비용 문제, 고급인력부족현상, 급속한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제조업은 앞으로도 우리 경제를 견인할 산업으로 영원히 지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제조업의 모습은 영원하지 않고 그 자체 생명력을 갖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려워진 경제여건 속에서 우리 제조업의 영원한 생존을 위해 이와 같은 산업체제 개편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