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피아]문명의 공존

 △문명의 공존, 하랄트 뮐러 저, 푸른숲 펴냄

 최근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공격으로 문명간 대립과 전쟁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냉전종식 이후 국제관계의 질서재편 방향에 관해 쏟아져 나온 여러 전망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다. 그는 96년에 출간한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 세계를 특징지을 충돌과 대립의 원천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나 경제가 아니며 문명이라고 역설했다. 헌팅턴의 이같은 파격적인 주장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패권주의적 시각이라는 비판에서부터 냉전 이후 국제질서에 대한 문명 중심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인 하랄트 뮐러의 ‘문명의 공존’은 바로 이에 대한 공개적인 문제제기이자 강력한 대안제시로 기획됐다. 그는 ‘반헌팅턴 구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구체적 반증과 함께 헌팅턴 구상의 허구성을 입증해 내고 있다. 헌팅턴이 이슬람문명에서 폭력적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사실을 들어 그 호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면, 뮐러는 이슬람문명권 국가들이 다른 어떤 문명권과 비교해도 육로경계가 길며 육로경계를 사이에 둔 국가들은 갈등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일반론에 기대어 반박한다. 또 중국과 북한의 이슬람지역 무기판매, 중국과 이란의 핵기술 협력 등을 이유로 이슬람과 유교 문명의 동맹 가능성을 거론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왜 헌팅턴이 이들보다 10배 이상의 무기를 이슬람 세계에 팔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지 반문한다. 이슬람과 비이슬람 교도의 갈등, 보스니아 분쟁 등 현재 진행중인 전쟁의 50% 가량이 문명간의 충돌로 빚어졌다는 헌팅턴의 주장에 대해서도 뮐러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이같은 갈등의 본질은 이해관계가 다른 세력간 통상적인 반목의 결과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인류역사를 ‘우리’와 ‘그들’, ‘선’과 ‘악’의 이분법적 도식에 억지로 끼워 맞춘 조야한 퍼즐에 불과하며 패권주의 야욕에 사로잡힌 미국 정부의 논리를 대변하는 괴변에 다름아니다.

 뮐러는 이것보다는 오히려 전자매체를 통한 세계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원거리 이동통신을 매개로 한 전지구화의 추세 등에 주목할 것을 권고한다. 전지구화는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단절된 채 대립정책을 펼 수 없도록 경제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킴으로써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간 대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 만큼 21세기 세계 정치의 화두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공존’, ‘폐쇄’가 아니라 ‘개방’이어야 한다.

 ‘문명의 공존’은 ‘문명의 충돌’이 제시한 세계상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항기획이자 강력한 반론으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시대 전환적 의의를 가진 것으로까지 과대 포장됐던 헌팅턴의 문명충돌 이론이 실상은 낡은 냉전논리의 변종이고 복잡한 현실 세계의 지나친 단순화며 미국 편향의 일방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는 뮐러의 단언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김종길 덕성여대 교수 way21@duk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