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에는 강하고 강한 자에는 약하다.’
스크린쿼터 문제가 한미 통상문제의 최고 정점에 달했던 지난 99년 정부의 고문변호사를 맡았던 통상전문가 김형진 미국변호사가 당시 미 정부의 통상정책을 놓고 평가한 말이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스크린쿼터제로 불거졌던 영화산업 개방문제였다. 미국정부를 등에 업은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집요한 시장개방 압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계와 정부가 합심해 강력하게 ‘문화주권’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대처함으로써 우리 영화산업을 보호하고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번 하이닉스 문제나 무선인터넷 플랫폼 ‘위피(WIPI)’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현재 아시아 지역의 주요 국가가 없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 이 점은 미국의 통상압력을 강화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고려대 경영학부 이장로 교수는 “인력과 기술과 시장이 아시아에 몰리고 모든 자본과 투자가 아시아에 집중되기 때문에 역으로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 부과하는 관세는 결국 자국 기업의 원가상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의 공장이자 최대의 고객이고 시장인 아시아로부터 조세나 조공(朝貢) 형태로 수혈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다국적기업을 내세워 라이선스와 로열티, 브랜드라는 무형의 자산으로 아시아지역 국가가 창출한 부가가치를 거둬들여야 생존하는 체제인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서의 가치창출 활동이 없으면 미국의 기업은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반도체 전문시장 조사기관인 디 디오스(Die Dios)가 내놓은 “미 상무부의 하이닉스에 대한 상계관세가 정상적인 시장흐름을 파괴해 D램가격을 떨어뜨려 오히려 마이크론과 PC제조업체들을 더 어렵게 할 수 있다”는 분석은 새로운 논리 개발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정부와 우리 산업계는 미국의 통상압력에 대해 그들의 ‘원칙’에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이 내세우는 원칙이 각국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아니라는 점과 ‘상황의 특수성’ 등에 대한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하이닉스측 통상팀 한 관계자는 “IMF 당시 특수상황에 대한 원칙적 공유가 없이는 하이닉스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우려를 나타냈다.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인 대응체계를 갖춰놓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후약방문식으로 해당 부처끼리 급조하는 대책팀이 아니라 사전에 각종 이슈를 발굴하고 역으로 공격할 카드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 국내외 통상이슈를 상시적으로 점검하고 준비하는 전담팀과 각국의 전문가 풀(pool)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산업계에서는 교차(cross) 라이선스를 갖는 데 힘을 모아야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석포 우리증권 애널리스트는 “우리 기업들은 자체 기술개발은 잘 하지만 이를 상용화하고 경쟁기업과 협력체계를 모색하는 데는 인색하다”면서 “교차 라이선스는 경쟁사간에 법정 분쟁으로 갈 일을 협상 테이블로 이끄는 아주 중요한 연계고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문제에서의 정답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각종 카드를 준비, 제시해 상대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탁월한 협상가의 노하우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정부에서도 마케팅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