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디자인을 배워서 남자친구에게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남자친구?’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밝은 미소를 가진 34세의 노처녀 유정희씨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미 결혼 정년기를 훌쩍 넘겨버린 그녀지만 늦바람(?)에 요즘 세상일이 즐겁기만 하다. 그런데 굳이 남자친구에게 홈페이지를 선물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를 본 순간 그 궁금증은 해소됐다.
유정희씨는 뇌병변 2급 장애인이다. 뇌병변은 뇌 신경계의 손상으로 운동이나 언어에 장애가 생기는 증상으로 흔히 뇌성마비라고 불린다. 행동과 언어가 불편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불편한 중증장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의지는 보는 사람을 새삼 놀라게 한다. 부산 한울장애인자활센타의 포토숍 수업시간 중 만난 그녀의 모습은 너무 당당하고 떳떳했다. 장애는 다소 불편할 뿐 편견과 냉소의 대상이 아님을 유정희씨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34세의 늦깎이 연애에 그것도 남자친구에게 정성껏 만든 홈페이지를 선물하려는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정희씨가 공부하는 과정은 웹전문가 과정으로 한울에서 운영하는 정보화 교육과정 중에서도 가장 상위과정이다. 20대 청년에서 중·노년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함께 배우고 있다. 웹전문가 과정은 웹디자인이나 홈페이지 제작의 전문 지식이나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과정이다. 그만큼 정희씨의 실력은 높은 수준이다. 물론 초중급 과정을 거쳐 꾸준한 노력이 가져다준 결과다. 당연히 수업에 임하는 태도도 남다르고 의욕이 넘친다.
불편한 몸이지만 수업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다는 정희씨는 “같이 숨쉬고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 공동체의식을 느끼기에 인터넷 이상 좋은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직은 여러 가능성을 모색중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한울 강좌에는 젊은층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취업을 자기와 거리가 먼 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몇마디 얘기를 나눠보면 모두 취업에 대한 관심을 내비친다.
“장애인의 취업이 힘든 현실적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한울장애인자활센타 사무처 이정인 부장은 설명한다. 이들은 초중급 과정을 거치면서 컴퓨터에 대한 관심과 적성을 발견하고 웹전문가 과정에 왔기 때문에 이 분야의 전문가로 지리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 못지 않다. 그러나 장애인의 취업이 쉽지 않은 우리사회의 현실은 노력만큼의 대가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2배, 3배의 노력을 더들여야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남보기 부끄럽다며 집안에 꼭꼭 숨어 사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장애인이 살기엔 세상이 빡빡하다. 이 부장은 “장애인 캠페인, 고용의무화 등 사회의 노력이 뒤따르고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아직 척박한 상태”라며 “정당한 실력평가를 통해 정당한 대우를 바라는 것뿐이지 더 이상의 특혜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고 장애인에 대한 시각교정을 요구했다.
또 장애인들에겐 출발선 자체가 공평하게 그어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 비해 이동이 불편하고 사회활동도 제약을 받는다. 자연히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의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단순히 장애인들에게 관련 지식을 전수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이동권, 교육권 같은 기본 권리들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뒷받침이 먼저따라야 한다고 이정인 부장은 말했다.
유정희씨는 “지하철 1번 갈아타고 마을버스 타고 1시간 30분 걸려서 배우러 와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른 수강생들도 1시간 이상씩 걸리는 이곳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곳곳의 높은 턱, 계단, 복잡한 환승구 등 숱한 ‘이동권 제약조건’들을 뚫고 이들이 여기에 모인다.
수강생들은 “진도 위주의 일반 학원과 달리 한명 한명에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고 능숙해질 때까지 조목조목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좋아요”라고 입을 모은다. 때론 ‘더블클릭’도 힘든 이들은 ‘혼자 가는 열걸음보다 함께 가는 한걸음’을 추구하는 한울에 정을 느낀다.
또 컴퓨터 교육을 통해 삶이 바뀌는 체험도 한울의 교육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측량일을 하다 은퇴한 문금숙씨(65)는 3년전부터 한울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그는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가 쏠쏠해. 나이 들었다고 손놓고 있으면 안돼”라며 “더 배워서 IT 강사로 자원봉사하고 싶다”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조선소에서 일하다 2000년 사고를 당한 박상문씨도 “병상에서 1년을 지내며 막막할 때 디지털카메라가 큰 힘이 됐다”고 털어놓는다. 뇌병변을 앓고 있는 26세의 청년 이행준씨는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며 앞으로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한다.
인터넷을 통한 각종 동호회 활동은 장애인들에게 세상을 열어주는 창이 되고 있다. 친구도 사귀고 e메일 교환·채팅을 하면서 사회 체험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울은 중증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방문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24회로 구성된 빵빵한 과정으로 참가자들이 추가 교육을 부탁할 정도로 호응이 높다.
물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화의 혜택을 전하기 위해 교육과정과 참가자를 늘리면 취업을 염두에 둔 고급과정의 교육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전문적인 내용을 늘이면 정보문화의 저변을 넓히기 어렵다. 한울이 초중급 과정과 웹전문가·자격증 과정을 나눠 운영하는 것도 이러한 고민의 반영이다. 현재 정책은 장애인들에 대한 정보화 교육을 확대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한울은 전문성을 갖춘 IT인력도 키워낼 수 있는 접점을 고민중이다. 실제로 지난 2월 한울을 졸업한 박정남씨는 현재 장애인 스포츠 전문 인터넷방송국 MBL에서 웹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 뇌병변 2급 장애인 이수정씨도 한울 졸업 후 ‘우리상담넷’이란 회사에서 플래시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장애의 벽을 넘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인기강사 문영선씨
“어떻게 하면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것만 줄곧 생각하니까요.”
문영선씨(40)는 한울장애인자활센타 컴퓨터 교육의 최고 인기 강사다.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설명. 몇번을 물어도 짜증내지 않는 한결같은 태도. 이해하기 쉽게 정성껏 준비하는 강의. 최고 인기 강사의 자리를 몇년째 지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듯 했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 조작이나 이해가 느릴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진도만 나가는’ 학원에선 장애인들이 버티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한울엔 다른 곳에서 교육을 받다가 이곳으로 옮긴 학생들이 많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참을성 있는 강의에 모두 대만족이다.
“제가 한울의 장애인 컴퓨터 교육 1기 졸업생입니다.”
문영선씨는 자신이 소아마비 3급 장애인으로 85년 한울 1기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 그후 부산과 서울에서 전산 사식, 지역신문사 등에서 전산관련 일을 쭉 해왔다. 그러다 한울의 제의를 받고 과감히 컴퓨터 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그를 거쳐간 학생만 300명 가까이 된다. 강의과목도 포토숍, 웹디자인, 플래시 등 다양하다.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가 쉽진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 장애인 대상 컴퓨터 교육에 뛰어들었단다.
선생으로서 역시 가르친 학생이 실력을 인정받아 취직에 성공할 때 가장 기쁘다고 문영선씨는 말한다. 그러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학생들의 e메일, 잊지 않고 때때로 전하는 안부가 더 가슴에 오래 남는다는 그는 강사를 천직으로 생각한다. “강의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해 줬으면…”하는 당부도 그렇다.
“가르치는 것이 제일 좋고 제일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문 선생님은 앞으로도 한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 같다.
■한울장애인자활센타는...
부산시 부평동에 자리잡은 한울장애인자활센타는 장애 어린이의 조기교육과 장애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공동체로 85년 설립됐다.
특히 한울은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컴퓨터와 인터넷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현재 컴퓨터 기초·중급·고급(홈페이지 제작) 등의 과정과 자격증 취득반, 웹전문가반 등을 운영하고 있다. 등록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교육을 신청할 수 있으며 한반 인원은 10∼15명 정도다. 또 거동이 불편한 중증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문 교육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울의 정보화 교육은 뿌리가 깊다. 처음 창립된 85년부터 한울은 10개월 과정의 컴퓨터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집중했던 이 과정 이수자들은 국민연금관리공단, 각 도서관 등에 취업하며 장애인들의 사회 진출에 앞장서 왔다. 그후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컴퓨터 교육을 중단했다가 99년 다시 시작했으며 2001년부터는 정보통신부의 장애인 교육 지원대상 기관으로 선정돼 보다 좋은 교육 환경을 갖게 됐다.
한울은 지난해 정보통신부가 실시한 85개 장애인 컴퓨터 교육기관에 대한 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A를 받기도 했다. 한울은 창립 이후 94년까지 88명의 졸업생이 사회에 진출했으며 교육이 재개된 99년 이후로는 3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의 끈끈한 네트워크는 한울의 자랑. 한울은 또 졸업생과 후원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는 ‘한울타리’라는 모임을 운영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한세희기자 h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