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12)아키라 모친을 만나다

 1999년 6월 9일 기요세(淸瀨)

 오후 이른 시간인데도 세이부(西武) 이케부쿠로(池袋)선 전차 안은 붐비고 있다. 가만히 보니 젊은이들이 많은데 큰 가방들을 들고 무리를 지어 떠드는 것을 보니 어디로 놀러가는 모양이다. 아, 세이부 라이언스 게임이구나. 이 자그마한 발견에 에이지의 마음은 모처럼 밝아진다. 그도 라이언스의 팬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프로야구계는 정계에 못지않게 집중화돼 있다. 정치는 자민당이라는 거대 정당이 다른 정당들을 압도하고 지배를 계속하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프로야구에 관한 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한 팀에 몰려 있어 두 개 리그의 총 열두 개 팀을 마치 자이언츠 팬과 기타 열한 개 팀의 팬으로 갈라놓은 듯하다.

 시골 출신인 에이지는 이 돈 많고 매스컴을 독차지하는 자이언츠가 싫다. 나머지 열한 개 팀에서 에이지가 좋아하는 팀이 플레이가 투박하고 공격적인 야구를 하는 라이언스다. 이 라이언스의 구장이 있는 곳이 바로 에이지와 히로코가 향하고 있는 기요세에서 멀지 않다.

 학교 다니면서 언뜻 들은 바로는 기요세는 예부터 병원이 많다. 아마 공기가 좋고 도쿄에서 멀지 않은 까닭이리라. 도쿄도의 북단에 위치한 기요세시는 도쿄에 농작물은 대는 사이타마(琦玉)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결국 농업과 병원이 주산업인 특이한 도시라 할 수 있다.

 기요세역에서 내려 안내지도를 보니 아키라의 모친이 입원해 있는 도쿄병원은 도보로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리인데 가는 도중에 큰 병원이 셋이나 있다. 도쿄병원의 정문에는 국립요양소 도쿄병원이라 쓰여 있다.

 현관에 이르는 마당이 넓고 건물들 주위에 소나무를 비롯해 수목이 울창한 것이 예사로운 병원이 아니다.

 곧바로 병원 현관으로 가려는 에이지의 소매를 히로코가 당긴다.

 “저기 가서 우리 땀 좀 식히지 않을래요”한다.

 오른편으로 소나무 사이의 작은 오솔길이 있다.

 “그러지.”

 아직 아키라의 모친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에이지도 우선 시간을 벌고 싶다. 오솔길로 들어서기 전에 입간판에 병원의 내력이 쓰여 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인 1939년 결핵군인의 요양소로 생겨 전후에 국립요양소가 됐다가 1962년에 국립요양소 도쿄병원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 내력이 있었군….

 아키라의 모친이 전쟁터에서 결핵에 걸린 군인들의 요양소에 있다는 사실이 왠지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

 오솔길을 백 미터쯤 들어가니 잔디밭이 퍼지며 언덕을 병풍처럼 하고 못이 고여 있다. 녹색물 속으로 비단 잉어들이 세상의 고뇌와 아랑곳없이 유유히 놀고 있다. 잔디에 듬성듬성 놓여 있는 돌벤치에 걸터앉아 에이지는 목의 땀을 닦으며 담배를 피워 문다. 히로코도 조용하다. 각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지 않은 분위기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겠지?”하며 에이지가 일어서자 히로코가 따라 붙으며 오른팔에 매달린다. 팔꿈치로 느껴지는 유방의 온기가 오래 쓴 베개처럼포근하고 마음이 놓인다.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 외부의 차분하고 전원적인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시장바닥 못지않게 사람의 왕래가 많고 어수선하다. 진찰도 아니고 입원도 아닌 두 사람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방문자 안내코너를 발견한다.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는 간호사의 눈초리가 매섭다.

 “저…후지사와라는 환자를 만나려고 왔습니다만….”

 “후지사와 누구지요?”

 “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름 전체를 모릅니다. 제 친구의 모친인데 성이 후지사와고 주소지가 고베로 알고 있습니다. 결핵 아니면 정신과 쪽으로 들었습니다만….”

 “아! 사다코상요? 둘 다예요.”

 “네?”

 “결핵에다 우울증하고 자폐증이 있어 양쪽 치료를 다 받고 있지요.”

 간호사는 마치 수많은 환자의 신상을 다 파악이나 하고 있는 듯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어……”하고 키보드를 좀 쳐보더니 “지금은 결핵병동에 있네요”한다.

 결핵병동은 중앙병동에서 우측 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아까 가본 연못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결핵병동의 너스 스테이션은 이층이다. 일층에서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조용한 것이 애들이 집에 가고 난 초등학교 교실과 같다. 더러 복도로 환자들이 다니는데 옷만 환자복을 입었을 뿐 잡지책 등을 들고 다니는 품이 기숙사 같은 분위기다.

 “실례합니다. 후지사와 사다코상을 면회하러 왔습니다만……”

 이 말에 서류에 뭔가 열심히 쓰고 있던 간호사는 놀란 토끼 같은 눈으로 말없이 카운터 건너편을 올려다본다. 에이지와 히로코도 말없이 시선을 주고 서 있다.

 몇 초가 지난 후 간호사는 서서히 일어서며 “무슨 관계시지요?”라고 묻는다.

 “네, 제 친구의 모친입니다.”

 “친구요?”

 “네…….”

 “그러면 후지사와 아키라상?”

 “네…….”

 영리하게 생긴 간호사는 무언가 판단을 하는 듯 손을 입에 대고 있더니 “저 쪽의 의자에서 잠깐 기다리시지요”라고 권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너스 스테이션의 안쪽으로 의자가 몇 개 있고 잡지 등이 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다. 결핵환자들도 세상을 알 필요가 있을 게다. 한 오십쯤 돼 보이는 환자가 주간지 같은 것을 열심히 보고 있다. 에이지가 힐끗 보니 여자 나체사진들이다. 저런 사진을 결핵환자가 봐도 될까 생각하며 환자를 눈여겨 보니 가랑이 사이에 낮은 텐트가 쳐져 있다. 발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히로코가 툭 치며 입을 귀에 가져온다.

 “있잖아…어느 책에서 봤는데 결핵에 걸리면 성욕이 왕성해진데요.”

 “어 그러면 나도 가벼운 결핵에 걸리고 싶은데……”하며 둘이 웃음을 누르려 하고 있는데 “손님”하고 아까 그 간호사가 부른다. 중년의 남자 의사와 같이 서 있다.

 “후지사와상의 정신과를 담당하고 있는 우에노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아까 말씀 드렸듯이 후지사와상을 좀 뵙고 싶어서요.”

 “실례일지 모르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이 병원에서는 방문자와 환자의 대화도 미리 컨트롤합니까? 아직도 군인병원인 모양이지요?”

 에이지의 도발적인 비꼼에도 의사는 품위를 잃지 않고 부드럽게 말한다.

 “혹시 후지사와 아키라상의 죽음과 관계가 있습니까?”

 “네? 그러면 병원에서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매스컴을 통해서?”

 “글쎄요…….”

 의사의 말에는 그 이상의 정보 소스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있다.

 이쯤 되면 솔직히 말하고 협조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방에서 이야기를 다 들은 우에노 박사는 일어서서 창밖을 한참 내다본다. 아까 에이지와 히로코가 가본 연못 뒤의 언덕 아래에는 약해진 오후의 해가 들어 이제 갓 보랏빛이 오른 수국이며 흰 여름동백 등이 서로 이야기하듯 빛나고 있다. 한참을 내다보던 우에노가 입을 연다.

 “후지사와상은 저희가 매우 중히 여기는 환자입니다. 뒤를 부탁하신 부군이 많은 헌금을 하시기도 했지만 부인 자신을 우리는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귀에 생소하기도 하고 후지사와 가문의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간호사가 곧 모시고 갈 테니 저기 연못가에서 기다리시요. 부인은 아직 우울증과 자폐증에서 다 회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핵약의 장기복용으로 신경도 쇠약합니다. 조금이라도 충격적인 말씀은 안됩니다. 그리고 아키라상의 죽음은 절대 안됩니다. 약속하십시오.”

 우에노 박사에게 약속을 굳게 하고 나와 연못가의 돌벤치에 앉아 여름 오후의 정원을 보고 있는데 “피스담배의 냄새군요”라는 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칠십은 넘어보이는 노부인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고 다가오는데 흰 머리와 은테안경, 그리고 연녹두색 환자복 위에 받쳐 입은 흰 카디건의 모습이 옛 명배우 오드리 햅번이 늙으면 저 모습이리라 추측케 하는 미모다.

 “옛날에 그 사람도 그 피스담배를 피우곤 했지. 참 오랜 만에 맡아보는 향기네”하며 에이지가 앉은 돌벤치 옆의 검은 자연석 위에 사뿐히 앉는다. 간호사를 포함해 네 사람의 눈은 모두 에이지가 발로 부벼 꺼놓은 피스담배 꽁초로 쏠린다.

 “아, 죄송합니다.”

 무의식 중에 에이지는 머리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한다.

sjroh@alum.mit.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