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씨 답지 않게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좁은 골목을 휘감고 돌았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7동 달동네에 불어오는 봄바람은 한겨울 삭풍처럼 차게 느껴졌다. 행정지명보다 ‘난곡’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그곳에 ‘꿈나무공부방’이 찬 골목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서울이지만 서울같지 않은 변두리 재개발지구에 태어나 도시아이들이지만 도시아이 같지 않게 자란 55명의 어린이들이 이 공부방의 주인이다.
매주 목요일 밤 7시부터 시작되는 컴퓨터수업은 아이들에게 안타까움과 인내심을 가르치는 수업 같다. 모두 7대의 컴퓨터가 있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컴퓨터는 단 2대뿐. 3D영상까지 즐기는 멀티미디어 컴퓨팅시대에 스피커와 연결돼 소리를 낼 수 있는 컴퓨터는 한 대도 없다.
중학교 2학년생 예닐곱명이 컴퓨터수업이 있는 날 오후 5시 30분부터 밀어닥쳐 컴퓨터를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하지만 2명만 성한 컴퓨터를 잡을 수 있고 나머지 4∼5명은 속절없이 다른 친구의 어깨너머로 공부를 해야 한다.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아이들의 집에 컴퓨터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기자가 공부방을 찾은 지난 14일, 아이들에게 인터넷세상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가 돼주던 초고속인터넷 1개 회선마저 요금체납으로 서비스가 중단돼있는 상태였다. 1000만명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시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난곡 아이들에게 인터넷으로 다다르는 길은 멀고 험난해 보였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지난 1월 발표한 ‘2003년 정보화 촉진시행계획’에 따르면 지난 2001년부터 전국의 5만명 저소득층 자녀에게 컴퓨터리스 비용과 초고속인터넷통신비가 지원됐으며 올해도 똑같은 규모의 5만명 어린이에게 정보화 혜택이 돌아갈 예정이다. 올해 교육부가 저소득층 자녀 정보화지원을 위해 쓸 예산은 261억원으로 책정돼 있다.
하지만 꿈나무공부방 어린이들에게는 이러한 정부차원의 정보화 지원에서도 소외된 것일까. 초등학생 33명, 중학생 20명, 고등학생 2명으로 구성된 꿈나무공부방 어린이들 중에서 집에 컴퓨터를 갖고 있는 아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자원봉사 교사들의 전언이다.
한사코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대학생 자원봉사 교사는 “저녁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구청에서 마련해준 우유와 간단한 도시락을 갖고 귀가하는 어린이가 10여명에 이른다”면서 “사글세 단칸방에 아이들을 위한 컴퓨터는 사치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토로했다.
물론 정부 정보화지원이 특정지역에 집중되거나 시도간 균형성을 잃는다면 그 역시 또 다른 차별적 요소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육부가 정보화지원 예산 집행에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을 활용하듯 이 기관을 통해 해당지역 어린이들의 정보화실태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고 그에 합당한 현실적 지원책이 실천돼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청소년개발원(http://www.kiyd.re.kr)이 지난해말 실시한 청소년 정보화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 99년부터 지난해까지 청소년가구의 컴퓨터보유율은 매년 가파른 속도로 증가해 지난해에는 무려 95.8%의 청소년이 자신의 가정에 컴퓨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난곡 꿈나무공부방 어린이라는 표본이 갖는 한계를 백번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들의 컴퓨터환경이 우리나라 전체 평균 청소년의 컴퓨터 보급상황에 현저히 뒤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자원봉사 교사는 “이곳 아이들의 컴퓨터 활용교육이 가정이라는 터전에서 이뤄지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며 “그렇다면 학교 컴퓨터교육의 내실화를 통해 가정에서 충분한 컴퓨터 활용이 불가능한 아이들을 집중 관리해 교육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청소년개발원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일반 청소년의 경우 가정내 컴퓨터 이용이 전체 84.4%로 소외계층 청소년의 가정내 이용률 48.4%를 배 가까이 앞질렀지만 학교내 컴퓨터 활용비율은 소외계층이 15.4%로 일반계층의 2.7%를 크게 앞섰다. 일반가정의 청소년이 학교 컴퓨터시설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것에 비해 같은 조건의 소외계층 청소년의 경우 학교 컴퓨터시설에 대한 의존도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따라서 난곡 꿈나무공부방 어린이들은 현재 다니고 있는 난향초등학교, 난우중학교나 구청 및 동사무소 운영 컴퓨터 교실의 혜택을 우선적으로 받아야할 필요성이 크다. 가정의 의무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컴퓨터 교육시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당장 실천 가능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난감할수록 희망의 크기는 커지는 것일까. 정보화 오지인 난곡에도 ‘천사’들은 분명히 있었다.
매주 목요일 오후, 꿈나무공부방 컴퓨터교육은 기존 자원봉사 교사들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SDS 봉사동아리에서 맡는다. 4∼5명의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매주 방문해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고 희망도 교육한다. 삼성SDS 봉사단원이나 아이들이 1주일 중 가장 행복한 한때를 함께 가꾸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교육을 실천하는 15명의 대학생 자원봉사 교사들도 난곡 아이들에게는 크나큰 은사들이다. 지난 2001년 1월 지금의 가건물이 들어서기 전 공부방이 화재로 전소되고 난 뒤 함께 울며 공부방을 다시 일으켜세운 것도 이들이고 지금의 공부방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든 것도 다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다시 고등학교로 진학해도 깨끗한 가방 하나 사줄 돈이 없는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 교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아이의 기분을 추켜세워 준 게 한두번이 아니다. 공부방 임대료가 없어 쩔쩔 맬 때는 일일찻집을 열어 함께 뜻있는 돈을 모은다. 사랑을 모은다.
꿈나무공부방의 어린이들이나 교사들이 지금 가장 큰 걱정거리로 안고 있는 것은 올해안에 지금의 신림7동 104-7호 가건물 2층 공간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55명의 어린이와 교사들이 길거리로 내쫓길 위기에 처해 있다.
난곡 골목길에 아이들의 신나는 놀이소리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컴퓨터는 없어도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확인해주기 위해서라도 꿈나무공부방에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햇살이 비춰져야 한다. 오늘도 60년대를 연상케 하는 신림7동 ‘난곡 달동네’의 골목길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꿈나무 공부방 (02)854-6209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kr>
<인터뷰>상근 자원봉사 교사 정여정씨
“아이들이 무슨 죄입니까. 부모님들에게 야속한 때가 많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해결해줄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소득층 밀집지역의 어린이들일수록 공교육의 혜택이 커져야 하고 정부지원 수혜폭도 확대돼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해 10월부터 꿈나무공부방의 상근교사로 자원봉사하고 있는 정여정씨는 그녀 역시 평범한 가정의 주부요, 자식을 둔 어머니다. 공부방 교사활동을 하면서부터 목소리만 더 커졌다는 정씨는 아이들의 천진스러운 얼굴에 부끄러움이 비칠 때 가슴 시린 안쓰러움을 느낀다.
“사회공동의 책임이란 것이 있잖아요. 난곡지역의 재개발문제가 그랬듯이 이 지역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실태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이 좀 더 높아져야 합니다. 소득간 정보화 격차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 여기서 찾아질 수도 있을 겁니다.”
정씨는 난곡아이들이 가정으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사회에서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서는 절대 안된다며 간절한 마음을 내비쳤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공부방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온기가 도는 공부방과 컴퓨터를 맘대로 쓸 수 있는 환경을 선물로 만들어주고 싶은 게 가장 큰 소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