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제록스가 제품 고장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모품에 장착하고 있는 전자칩이 자사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해 7월 K은행은 국내 프린터 업체인 양재시스템으로부터 2500여대의 흑백 레이저 프린터를 구입하고 소모품도 공급받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K은행은 시장에서 양재시스템이 공급하는 소모품과 똑같으면서도 가격이 싼 엡손 제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엡손 소모품은 양재시스템 것보다 개당 1만∼2만원 저렴해 월 평균 1200개를 사용하는 K은행으로서는 적어도 매월 1000만∼2000만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찼다. 게다가 이 소모품은 다 쓴 카트리지에 토너 가루만 다시 집어 넣은 리필 제품이 아니라 엡손이라는 프린터 회사의 제품이라 품질에 대한 신뢰도 높았다.
하지만 K은행은 엡손 제품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유는 소모품에 달린 전자칩 때문이다. K은행측은 알아보니 양재시스템과 엡손의 소모품은 동일한 제품이었지만 서로 호환되지 않게 전자칩에 다른 정보가 입력됐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됐다. 모 소모품 전문 업체에서도 “실제로 양사의 전자칩을 바꿔 장착했더니 프린터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밝혔다.
K은행 구매팀의 박모씨는 “같은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칩 하나 때문에 왜 우리 회사는 일방적으로 비싼 소모품만 써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사전에 이런 전자칩이 있는지 알았더라면 프린터 구매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을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양재시스템과 호환되는 소모품은 국내 총 세가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모두 일본 후지제록스의 동일한 프린터 엔진을 사용해 소모품도 같다. 하지만 엡손 제품만 호환이 되지 않는 것은 일본 후지제록스가 엡손에 다른 전자칩을 제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프린터 엔진을 생산하는 업체가 소모품도 같이 제조하기 때문에 전자칩은 일본 후지제록스가 엡손의 요구대로 다르게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프린터 엔진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으로 판매 중인 신도리코도 “주문 업체가 호환되길 원하면 호환되는 소모품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 전자칩으로 인해 소비자의 일방적인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K은행의 경우처럼 엄연히 시장에 존재하는 저렴한 제품, 게다가 같은 회사에서 생산된 동일한 제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칩 때문에 이를 구입할 수 없으며 업체의 일방적인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오히려 숨기면 숨겼지 사전에 이같은 칩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회사도 전무하다. 게다가 K은행은 소모품 가격을 아껴보고자 리필 제품을 구입하려 했으나 이도 이 전자칩 때문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어서 사실상 소비자의 선택권은 박탈된 상황이다.
K은행은 이같은 내용을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 알리는 한편 소모품 전문 유통 업체를 통해 전자칩을 무력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