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줄거리: JTT 인사과장 요코다 도시오와 모친간의 관계를 밝혀 달라는 아키라의 부탁을 받은 광역폭력단 야마이치 고베구미의 혼다 지카라와 니시구치 다다오는 요코다의 강압에 의하여 아키라의 모친 사다코가 몸을 허락해 왔다는 확증을 잡게 된다.
1973년 9월 10일
도쿄
지카라는 간사이(關西) 사람이다. 고베현의 촌에서 태어난 지카라는 오사카, 고베,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가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關東)에 눌려 있다는 일종의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 오랜만에 와보는 도쿄역을 내리니 멀리 황궁(皇宮)이 보인다. 아키라가 근무하는 JTT 근처의 약속장소까지 멀지 않은 거리이고 아직 시간이 일러 걷기로 한다. 역 앞의 로터리를 벗어나니 회사빌딩들이 즐비한데 미쓰비시(三菱) 간판이 많다. 명치 초기에 미쓰비시의 주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대만정벌에 군인을 실어 나르는 등 공헌을 세운 대가로 이 노른자위땅을 정부로부터 싸게 불하 받은 까닭이다. 비록 야쿠자가 되었으나 지카라는 고교시절 수업에 충실한 편이어서 역사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미쓰비시 왕국을 지나고 나니 황궁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지며 니주바시(二重橋)문이 눈에 들어 온다.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황궁 안에 대한 궁금증을 가장 자극하는 것이 저 니주바시문이 아닐까. 명치유신의 성공으로 교토에 있던 천황이 도쿄로 돌아올 때 통과한 고색창연한 다리는 세월을 모르는 듯 녹색의 못 위에 고즈넉하게 서 있다. 부모의 불운에 대한 반항으로 극도에 몸을 실었으나 천성적으로 착하고 탐구적이었던 지카라는 야쿠자들의 무리를 떠나 있을 때면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하여 내면적으로 고뇌한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정돈된 황궁을 지나가며 지카라는 자기 삶이 앞으로 어디로 흐를지 목적 없는 인간의 상실감을 뼈저리게 느낀다.
JTT가 있는 히비야를 지나 스키야바시(數寄屋橋)의 이자카야(선술집)에 들어간 시각은 아직 6시반. 아키라가 나타나려면 반시간이 남아 있다. 매사에 빈틈이 없어 학교 다닐 때 독일병정이라 불리던 아키라는 분명 제 시간에 나타날 것이다. 요코다와 사다코상의 간통장면 녹음을 듣고 난 니시구치 다다오와 지카라는 사다코상이 위협에 못 이기고 오랜 동안 통정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놓고 고민 끝에 아키라에게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하고 이 임무를 지카라가 맡게 된 것이다. 순수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키라에게 이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나. 고민을 하며 맥주를 두 병이나 비웠을 때 아키라가 들어 온다.
곱슬곱슬하게 볶은 머리에 보라색 양복을 입은 지카라는 한눈에 보아도 건달이다. 이에 비하여 아키라는 회색양복에 검은 테 안경을 낀 전형적인 샐러리맨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 안고 잠시 정을 나눈다. 어린 시절 부잣집 아들 아키라가 가난하고 구박 받던 자신을 대해주던 따뜻함을 지카라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교길 구경하기 힘든 초콜릿을 나누어 주며 공원 벤치에서 숙제를 도와주던 아키라는 지카라의 마음 속에서 성인이 된 오늘도 존경의 대상이다.
말 없이 맥주 잔을 기울이다 아키라가 묻는다.
“그래 뭔가 알아 낸 모양이지. 전화로 말 못하고 이렇게 도쿄까지 오다니….”
“네…. 형 우리 밥이나 먹고 옆에 있는 포장마차로 옮깁시다.”
지카라는 딴 소리를 한다. 실내가 비교적 조용하여 이야기 꺼내기가 두렵다.
“그러지.” 역시 아키라의 눈치는 빠르다.
스키야바시와 제국호텔 사이로는 전차선이 달리고 그 밑으로 음식점이 즐비한데 굴다리에는 포장마차가 있어 늘 야키토리(꼬치닭구이) 냄새가 진동하고 연기가 자욱하다. 일류회사의 사장도 차를 세워 놓고 한잔하고 간다는 이 포장마차에는 외국인이며 일본인이 늘 붐빈다. 시끄러워 오히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안성맞춤이다.
“그래 뭐가 나온거야.”
“그게….”
“야 임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나도 감이 있으니까.”
“형, 성질내지 마세요. 그 요코다라는 새끼가 사모님에게 손을 대는 거 같아요.”
이 말에 아키라는 사형언도 받은 죄수처럼 얼굴이 푹 떨어지며 술잔을 꽉 쥐는데 술잔이 깨지며 베인 손에 피가 배어 나온다. 지카라는 딱히 할 말도 없고 아키라가 진정할 때까지 술을 홀짝일 뿐이다.
“어떻게 알았지?”
“미행했어요.”
“그래서?”
“요코다와 사모님이 가끔 만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결국은 호텔에 들어간 것을 도청장치로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상황이라니?”
이 말에 지카라는 금방 대답을 못하고 담배를 피워 물고 주위를 둘러본다. 옆 테이블에는 서양인 남녀들이 앉아 있는데 모두 금발이 진한 것이 북구인들인 모양이다. 그 중의 한 여자가 눈 웃음을 치며 자신을 쳐다본다. 지카라는 잠시 그 금발의 미녀와 사랑을 하는 장면을 꿈꾸다 아키라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사모님이 왜 그런 인간과 더구나 연하의 놈인데 관계를 맺었을까요? 도청한 내용을 들어보면 지금까지 많은 밀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사모님은 이를 원하지 않고 있어요. 관계를 끊어 달라고 애원을 하시던데. 아니 처음부터 오야붕에게 말을 했다면 세상에 간단히 처리할 일을 가지고….”
“내가 원인이야….”
“아니 형이 원인이라니요?”
“입사할 때 내가 조선계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거든…. 뇌물과 협박으로 그 때는 넘어 갔는데 이 요코다라는 새끼가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를 협박해 온 것 같아. 내가 JTT를 포기하면 될 것을.”
“아니 오야붕께 말씀드렸다면….”
“야, 너 우리 어머니가 그런 말씀 못 드릴 것 알지 않아. 아버지가 알면 제거해 버린다는 것을 아시고 차마 말 못한거야.”
“네….” 지카라도 이해가 간다. 사다코상은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정도로 착한 여자다.
“도청을 했다면 누가 들었냐?”
“제가요.”
“혼자만이?”
“네. 그런데 그게 녹음을 해서 다다오 형님께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다다오도 들었단 말이지.”
“네.”
이 말에 아키라는 심한 낭패감을 느낀다. 자신의 치부를 지카라에게 보일 수는 있어도 니시구치 다다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기생인 그 놈은 친하게 지내면서도 늘 아키라의 재능과 부모의 음덕에 대하여 부러움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 놈을 어떻게 할까요?”
“글쎄 말이다.”
“제거하지요.”
지카라의 이 말을 아키라는 내심 기다렸다. 꽃보다 더 아름답고 이슬보다 더 깨끗한 어머니를 더럽힌 놈을, 더구나 자신의 사회진출을 볼모로 이용한 비열한 인간을 용서할 수는 없다.
“방법이 있겠니?” 아키라는 본인이 내 뱉은 이 말에 스스로 놀란다. 살인을 부탁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더 깊은 마음 속에는 아버지가 걸어 온 폭력의 길에 본인도 가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운명의 야속함이 먼데의 징소리처럼 퍼져온다.
“방법이야 많지요.” 지카라는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을 한다.
“어떻게?”
“납치해서 소리없이 없애는 수밖에 없어요. 간단히 죽이고 말 수는 없지요. 말을 좀 들어보고 충분히 고통을 주지 않으면 안돼요.” 지카라는 마치 이런 일은 많이 해 봤다는 말투로 자신 있게 말한다.
“네가?”
“음…. 역시 저 혼자는 무리예요. 그리고 제 상관인 다다오 형님께 보고를 드리고 같이 상의를 해야 겠지요.”
“지카라야. 다다오에게 알리지 않고 너 혼자 처리하는 방법은 없겠냐?”
여기서 지카라는 고민한다. 사실 다다오와 지카라는 상하관계이지만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아키라의 이 부탁을 들어 준다면 평생 은혜를 갚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아키라와 그 모친에게 많은 은혜를 입지 않았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극도에 남아 있는다면 앞으로 출세는 떼어 논 당상이다. 오야붕의 부인을 더럽힌 놈을 제거했다는 것은 큰 공으로 인정 받게 될 터다. 그러나… 아직 자신에게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잔인한 다다오가 혼자 처리했다는 것은 알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형, 어렵겠는데요. 아무래도 조직의 일로 처리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다다오 형님과는 원래 우리 삼총사 아닙니까? 다다오 형님도 형 이상으로 분개하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아키라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단연히 말한다.
"지카라야, 돌아가서 다다오에게 전해라. 이른 시일 내에 납치해서 죽이지 말고 나를 부르라고.”
“네” 지카라는 아키라의 차갑고 과단한 어조에 새삼스럽게 놀란다.
이야기를 마치고 둘은 제국호텔 앞을 지나 히비야 공원으로 들어간다. 10시가 넘은 시각이어서 인적은 드문데 공원을 둘러 싼 빌딩들에는 아직 불들이 켜 있어 마치 검은 숲을 걱정하듯 내려보고 있는 모양이다. 밤 늦은 공원 안을 천천히 걸으며 둘은 제 각기 옛날을 생각한다.
“우리 학교 다닐 때 늘 하교하던 나미키도리(?木通)의 나무들은 이제 무척 컸을 걸.”
“그럼요. 가볼 새는 별로 없지만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보초같이 경례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말은 안 하지만 둘은 보통의 일본사람으로 보통의 가정에 태어나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동병상린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 오랜 만에 그 노래나 한 번 불러볼까?” 아키라의 제언이다. 옛날에 다다오랑 셋이서 부르곤 하던 우에오 무이테를 말한다. 밤 깊은 히비야 공원에 두 청년의 낮은 노래가 퍼진다.
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위를 향하고 걷자)
나미다가 고보레 나이요니(눈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슬픈 노래다. 그리고 오늘은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하는 노래다.
sjroh@alum.mit.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