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나카노 교코 지음/김성기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1만2000원 

 80년대 중반 이후 발행된 독일의 지폐와 우표에 한 여성의 초상화가 잇따라 실린다. 꽃과 곤충에서 자연의 비밀을 그려낸 여류 곤충학자이자 동판화가인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1647∼1717)이 바로 그다. 마리아 메리안은 여성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던 바로크 시대에 곤충의 변태과정과 생태를 생생하게 묘사한 동판화로 당시 막 태동하기 시작한 곤충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녀는 이복형제들의 냉대와 육아, 난봉꾼 남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출판 공방을 경영했고 곤충의 생태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했으며 개성넘치는 동판화 화풍을 확립했다.

 작고 어두운 규방을 벗어나 독일과 네덜란드의 대자연, 그리고 머나먼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정글 속에서 그녀가 가느다란 동판화용 조각침으로 건져 올린 곤충과 식물들의 생태·모습은 당대 사람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깨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크 시대 사람들은 곤충이 알→애벌레→번데기→성충으로 변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갑자기 생긴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300년 전 그녀가 그렸던 그림들은 그대로 현대 곤충도감의 원형이 됐다. 하지만 그녀의 이러한 업적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세기 중반부터다. 이 시기에 독일에서 그녀의 초상화가 실린 지폐와 우표가 나온 게 바로 그 증거다.

 나카노 교코의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는 파란만장한 마리아 메리안의 일생과 치밀한 과학적 관찰과 감각적인 예술이 어우러진 그녀의 작품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와세다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문화를 일본에 소개해온 저자는 남성 중심의 과학자 사회와 엘리트주의 예술사에서 무시되다가 최근에 재조명되기 시작한 마리아 메리안의 생애와 작품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되살려 냈다.

 저자가 마리아 메리안에게 푹 빠져 그의 일생을 그린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독일 마르크 지폐의 초상화에 관한 글을 준비하던 중 500마르크짜리 지폐에 실린 한 여성을 보게 된 저자는 여러 문헌을 뒤진 끝에 그녀가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식물화가이자 곤충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페스트와 마녀재판이 횡행하던 시대에도 이런 직업이 있었던 말인가 하는 호기심을 갖고 그녀에 대해 조사해 가던 중 차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동판화 제작자이자 출판업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특정한 단체에 소속되거나 대학에 가지도 않은 채 오직 독학으로 곤충을 연구했다. 당시에는 곤충학이라는 학문분야도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곤충은 부패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리안은 그런 사고방식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곤충의 변태과정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즉 그녀는 한 장의 그림에 곤충의 먹이인 화초와 더불어 알·유충·번데기·성충 등을 함께 묘사해 곤충의 일생을 보여주는 기법을 사용했다. 오늘날의 도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묘사법을 바로 그녀가 확립해 놓은 것이다.

 곤충학의 선구자는 그 일생 또한 파란만장했다. 두 딸을 떠맡은 이혼과 수도원에서의 은둔생활을 경험한 뒤 52살의 나이에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수리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만 2년 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오가면서도 연구와 스케치에 몰두한 결과 귀국 후 일생의 대작을 제작하게 된다. 양피지에 수작업으로 채색한 일흔두장의 연작 동화판 ‘수리남의 곤충의 변태’가 그것. 저자는 이 작품을 접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고 회고한다. 얀 데 헴으로 대표되던 그 시대의 화훼화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 가장 놀라운 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그녀의 작품은 참신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에 열광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일부러 그녀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작품을 구입했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한 여성의 삶을 복원한 이 책은 수많은 제약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 변태하기를 꿈꾸는 현대인에게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김종윤기자 jy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