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체감경기는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특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조해 제2의 퀄컴을 꿈꾸며 불황을 돌파하려는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소프트-실리콘 반도체, M2M(Machine-to-Machine) 네트워크, 스위치 패브릭(Fabric) 등이 그것.
이들 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밸리가 불황에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시러스로직의 창업자가 분사해 만든 크레이들은 스스로 3세대 반도체라고 규정한 ‘소프트-실리콘’ 반도체를 선보였다. 이 회사 아서 창 사장은 “차세대 반도체 혁명을 이룬다는 생각으로 지난 3년간 꾸준히 연구개발해 지금부터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밸리의 벤처캐피털이 전체 투자규모를 줄여도 소프트웨어, 바이오, 제약, 차세대 반도체 투자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DSL용 칩 제조업체 센틸리움은 차세대 ADSL 칩인 ‘ADSL++’를 발표했다. 이 회사는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VDSL 육성정책이 또다른 과잉투자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기존 장비의 업그레이드만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해 이목을 집중 시켰다.
밸리의 반도체기업에 매년 10% 이상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시장은 로도스(Rhodes:희망의 섬)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아시아 주요 국가의 반도체 및 통신 시장을 겨냥해 연구개발(R&D)계획을 발표하는 등 구애작전을 펴고 있는 것.
내셔널세미컨덕터는 한국에 R&D를 위한 디자인센터를 세우기로 했으며 오디오용 반도체 업체 트라이패스와 F램 개발업체 램트론도 담당자가 한달에 두번꼴로 아시아를 방문하며 시장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기술중심 IT기업들의 인수합병 소식이 활발하다는 소식은 밸리가 기지개를 펴는 것이 아닌가라는 분석을 낳고 있다.
지난달 디지털TV업체 오크테크놀로지를 인수한 조란(Zoran)은 8월중 합병을 완료해 종합 디지털네트워크 플랫폼(Z박스)을 선보이겠다고 발표했으며 반도체 칩 디자인 업체 마그마(Magma)는 동종업계 아플러스디자인사를 인수한다고 발표해 눈길을 모았다.
회복신호를 확신한 헤드헌터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노키아의 로버트 스콧 부장(매니저)은 “지난해에는 헤드헌팅 제의가 거의 없었으나 요즘은 한달에 한번꼴로 이직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며 “전쟁과 사스가 지나간 이후 경기가 좋아지고 있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섣부른 IT경기 회복전망에 우려를 표시하는 목소리도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 현장에서 바라본 현실은 이제 기지개를 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해도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최근 장비재료 시장 동향 발표에서 지난 1분기 반도체장비 수주율과 웨이퍼 출하량이 전년 동기에 비해 9%와 16%씩 각각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서 루밥시트 연구원은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최악의 시기는 끝났다(Worst is over)”라고 말했다. 이는 실리콘밸리의 현재 분위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손재권기자 gjac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