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정근표 지음 김병하 그림 삼진기획 펴냄
동네 어귀마다 하나씩 자리잡고 있던 구멍가게를 이젠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형할인점들이 잠자고 나면 불쑥 생겨나면서 구멍가게들이 하나둘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멍가게’라는 말에는 여전히 추억과 정겨움이 묻어난다.
구멍가게를 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잔잔한 감동과 웃음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저자 부모님의 땀과 정성, 그리고 오남매의 추억과 주변인물의 삶이 어우려져 힘들고 고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한 보금자리를 이루었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자 헌사이다.
‘구멍가게 오남매 중 둘째아들인 주인공은 연탄배달이 제일 싫은 평범한 소년이다. 매번 형의 옷을 물려받아 변변한 새 옷 한번 입어본 적이 없고 공부 잘하는 형과 동생 탓에 심부름은 모두 자신의 차지인 것만 같아 늘 불만이다. 하지만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짐자전거를 끌고 채소시장에 나가 장을 봐 오시는 아버지와 세수만 겨우 하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일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누구보다도 속 깊고 정이 많다.’
이 책은 열네살 소년의 일상과 소년이 가족의 소중함, 이웃의 사랑을 느끼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다. 부모님과 형제, 동네 아줌마와 아저씨,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박하면서도 때론 가슴 뭉클한 사연들을 들려준다.
소년이 바라본 14가지 따뜻한 세상읽기로 구성된 이 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왠지 낯설지 않다. 빠듯한 살림에도 시어머니에게 매일 꽁치 한 토막을 올리는 ‘꽁치 아줌마’의 모습은 우리 옆집 아주머니를 닮았다. ‘식이 아재’처럼 몸이 불편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어느 동네에나 한 명씩 있게 마련이다. 또 헌 팬티가 입기 싫어 불평하는 아들에게 새 것을 주고 자신은 아들의 팬티를 기워 입고 다니는 아버지와 이른 아침부터 아들을 위해 아쉬운 소리를 마다 않는 어머니의 이야기. 그걸 보고 마음과는 다르게 오히려 화를 내고 마는 아들의 이야기인 ‘부모’에선 바로 내 아버지·어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아릿하다.
이외도 이 책에는 따뜻한 일상을 잔잔하게 보여주면서 슬며시 미소짓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있다. 예쁜 여선생님에게 잘보이고 싶어 멀쩡한 검정 고무신을 억지로 찢고 흰 고무신을 사달라고 조르지만 끝내는 다시 검정 고무신을 신게 된다는 내용의 ‘검정 고무신’에선 그 때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이 떠올라 잔잔한 웃음을 준다. 연탄 배달이 싫어 괜히 연탄을 파는 삼식이 형제에게 심통을 부리지만 열심히 사는 형제들의 모습에 후회한다는 줄거리의 ‘십구공탄’은 그 시절 어렵지만 최선을 다했던 이웃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세대에 관계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가족애와 형제애, 이웃간의 정을 끄집어낸다. 따라서 책을 읽는 사람이 새끼줄에 묶인 연탄을 사보거나 검정 고무신을 신어 본 적도 없고 알사탕의 달짝지근한 맛을 추억하지도 못하는 20대 젊은 층이든, 실제로 같은 시대를 살아와 그 시절을 손에 잡힐 듯 생생히 기억하는 중장년층이든 느끼는 것이 많이 다르지 않다.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가족이 서로 의지하고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돕는 모습, 어렵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전 모니터제를 통해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모니터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은 각각 다른 장면, 다른 사람을 추억하며 글을 읽었지만 착하고 순박하게 사는 주인공들을 통해 위안을 받고 힘을 얻었다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가난하지만 지금보다 더 따뜻하고 정겹던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층에겐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 될 터이고 어른들에게는 옛 추억을 되살리며 오랜만에 향수에 젖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종윤기자 jy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