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인용이야 김점선 지음 마음산책 펴냄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를 바탕으로 동화적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서양화가 김점선씨(57)가 컴퓨터 그림을 시작한 것은 오십견의 극심한 통증으로 붓을 들기 힘들던 1년 전부터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컴퓨터 전공의 아들이 노트북과 태블릿을 사다줬고 그것이 그의 미술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그는 어깨 통증에도 불구하고 손목을 움직여 붓과 캔버스 대신 컴퓨터와 마우스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디지털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푹 빠져 있는 그는 얼마전부터 성인 오락물인 ‘화투’를 디지털 그림으로 재창조, 또 한번 한국화단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화투를 천박하게 바라보는 것은 ‘오염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친구가 없어도 하루종일 화투를 가지고 놀던 외할머니를 보고 자란 그에게 화투는 한가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놀잇감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
고스톱을 치다가 목단·청단 그림이 들어오면 너무 예뻐서 내놓기가 싫을 정도라는 그는 결국 화투의 매혹을 시각화하기에 이르렀다. “화투를 민중오락, 민중미술, 팝아트로 바라봐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는 8월 23일까지 강남 역삼동 스타타워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 김점선표 화투그림 등 300여 작품을 선보인다.
개인전과 때를 맞춰 그의 작품과 함께 인생사를 엿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출간돼 눈길을 끈다. 이 책에는 강렬한 개성을 지닌 한 예술가의 자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73편의 산문과 57편의 디지털 화투그림이 담겨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림과 산문들은 불과 몇 편을 제외하고는 미공개 신작들. 저자는 틈틈이 자판치기 연습을 하며 기록해 둔 글들을 자기검열이나 외부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을 가감없이 드러내보인다.
‘나는 성인용이야’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쓴 산문에서 따온 것. 1부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산문에는 저자의 여리고도 강한 성정이 드러나는 일화가 실려 있다. 한 동네에 사는 어린 친구와 메일을 주고받던 저자는 메신저를 차단했다가 급기야는 삭제해 버린다. 어느날 길에서 그 어린 친구와 만난 그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왜 메일 차단했어요? 풀어주세요. 안돼. 나는 성인용이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위험하단 말이야. 나는 횡설수설하는데 그건 너희들에게 도움이 안된다 말이야. 너희들의 가치관을 흔들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너의 부모가 나 같은 사람과 메일한다고 하면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을거야. 왜요? 나는 조금은 문제적인 어른이잖아. 본받을 만큼 규범적이거나 훌륭하지 않잖아.’
저자는 아이들을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말을 가려듣지 않고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조심스러워진다고 한다. 스스로 ‘문제적 어른’임을 밝히고 어린 친구와의 절교를 선언하는 저자의 태도는 정직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하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저자의 일상을 소개하고 2부에서는 창작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저자의 어린시절과 더불어 아버지·어머니·삼촌에 관한 일화와 유년의 추억이 펼쳐진다. 끝으로 4부에서는 박완서·황인숙 등 친숙한 국내 작가에서부터 미셀 캥, 알랭 레몽 등 국외 작가에 이르기까지 그가 최근에 쓴 서평들이 수록돼 있다.
<김종윤기자 jy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