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23)아주 오래된 만남

 지난 줄거리

 아키라의 자살에 관한 의혹을 풀기 위해 에이지는 미국으로 가서 에리카와 결혼한 것으로 생각되는 브랜다이스대학의 미국인 교수를 찾아 결국은 에리카와 재회하게 되는데….

1999년 6월 17일

매사추세츠 벨몬트

 강렬한 오후의 태양이 사물의 명암을 분명히 해준다. 코헨 교수의 집은 수목이 많은 벨몬트에서도 골프장에 인접해 있어 사위가 다 풀과 나무다. 골프장 쪽으로 있는 베란다에서는 그린이 멀지 않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말이 들릴 정도다. 그린에서는 두 쌍의 노부부가 퍼팅을 하는 중이다. 분홍색바지에 초록색 티셔츠. 서양 노인네들의 옷차림에 에이지는 심한 위화감을 느낀다.

 “어떻게 죽었어?” 에리카의 이 말에 에이지는 화들갑 놀란다.

 수목이 우거진 가든에서 아이스티 글라스의 물기를 만지고 있던 에리카가 갑자기 던진 질문이다. 해가 내리쬐고 벌이 꽃을 희롱하는 자연 속에서의 질문치고는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잔인하다. 더구나 벌레 한 마디 못 죽일 정도로 부드럽고 매사에 깊은 배려를 가지고 있던 에리카의 입에서 말이다. 즉답을 안하고 에이지는 물끄러미 에리카를 바라본다. 정녕 삽십년이 가까운 성상이 지난 만남이다. 아키라와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몸에 다소 살집이 붙고 피부에 선탠이 생겼을 뿐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한때 얼마나 동경하고 갈구하던 몸이던가. 도쿄대 데모시절 아키라와 함께 셋이서 여관에서 지내기도 하던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갑자기 그 촉감이 손끝에 회상된다. 어느 밤 셋은 술에 취해 여관에 들어 에리카를 가운데 놓고 양쪽에 아키라와 에이지가 잠이 들게 된다. 에이지가 목이 타 눈이 번쩍 띄었을 때 방은 캄캄한데 가만히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손이 에리카의 사타구니에 얹혀 있는 것을 느낀다. 불현듯 에리카를 갈구하는 마음이 솟구쳐 손은 에리카의 속옷을 파고 들어간다. 지금도 명료하게 기억하지만 그때 에리카는 깨어 있었고 자신의 손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에이지의 손가락이 에리카의 은밀한 부분의 안에 들어가고 둘은 숨을 죽이고 한동안 암흑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차츰 옆에 있는 아키라에 신경이 가고 손가락을 빼었을 때 그 손가락에 남았던 에리카의 체액에 대한 기억은 에이지에게 전사의 훈장처럼 소중히 남아 있다. 그 짧은 순간이 에이지에게는 생을 통하여 사랑이라는 것에 가장 가까이 갔던 지점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죽었어?”

 에리카의 반복되는 질문에 에이지의 생각은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 화창한 여름의 오후에 통증에 가까운 정욕을 느낀다. 아이스티로 불꽃을 죽이듯 몇 모금을 마시고 에이지는 비로소 입을 연다.

 “에리카상 너무 놀라지마. JTT 옥상에서 투신을 했어.”

 이 말에 에리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지를 쏘아 보는데 눈에 눈물이 고여 초점이 어딘지를 모르겠다.

 “왜?” 조용히 눈물을 닦아내며 힘없이 묻는다.

 “글쎄, 그 이유가 나도 알고 싶어 여기까지 온 거야. 나 회사도 그만 두었어. 아키라를 위하여 그의 비밀을 풀고 싶어. 그리고 원한이 있다면 그것도….”

 “Hey, how are you guys doing?”하며 코헨 교수가 다가오는데 양손에는 각종 치즈와 크래커가 얹힌 쟁반에 포도주가 들려 있다. 탁자 위에 음식을 올려 놓으며 에리카와 에이지의 대화가 심각함을 느끼고 자리에 앉아 말없이 잔에 포도주를 따른다.

 “역시 아키라상 이야기인가?” 코헨이 묻는다. 유창한 일본어다.

 “아키라상이 ….” 옥상에서 투신하였다는 말을 에리카는 잇지 못한다.

 “하니, 미안해. 신문의 기사를 읽고 아키라상의 자살에 관해서만 말했지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은 것은 우리 서로 약속에 따른 거야. 간 사람은 아깝지만 살아 있는 사람마저 비참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코헨이 부드러운 말로 변명한다.

 “왜 그렇게 처참한 죽음의 길을 택했을까?”

 “에리카상, 나도 그게 궁금해. 우리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아키라군은 남에게 폐 끼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야. 그런 그가 회사에 막심한 폐가 될 것을 알며 새벽에 회사 옥상에 올라가 히비야 공원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투신하였다는 것이…, 남이 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이 에이지의 말에 에리카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히비야 공원?”하고 묻는다.

 “그렇지. JTT사옥의 길 건너편이 히비야 공원이니까….”

 하지만 에이지의 이 설명이 에리카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히비야 공원…, 둘이 사랑을 속삭이고 아키라가 구혼을 하였던 꽃의 정원…. 에리카는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명료하게 아키라의 무언의 절규가 들려온다. 아! 아키라는 나를 생각하며 몸을 던졌구나….

 코헨은 아내가 생각에 침잠하는 것을 보며 동정심과 질투가 섞인 야릇한 느낌에 휩싸인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두고 질투를 느끼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져 와인잔을 들고 자리를 일어난다. 오후는 오렌지빛 하늘을 남기며 저녁으로 바뀌고 있었다. 골프장에는 어느덧 인적이 사라지고 다람쥐들이 나와 뛰논다.

 “에이지상, 혹시 아키라가 남겨 놓은 것은 없어요?”

 “글쎄, 그게 말이야. 고인이 가기 전에 열쇠를 내게 남겨놓고 갔는데 역에 있는 라커를 열어보니 어려서부터 쓴 일기가 가득 들어 있었어….”

 “일기….” 에리카는 또 한번 놀란다. 말없이 와인잔을 든다. 에리카의 살구빛 브라우스와 레드와인과 배경의 초록이 보석을 섞어 놓은 듯 아름답다.

 “물론 그 일기는 내가 보관하고 있지.” 에이지가 잇는다.

 “일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누구예요?”

 “글쎄…, 기본적으로 없다고 봐야지….”

 “기본적이라니…, 에이지상 이 외에도 본 사람이 있나?”

 “음… 내가 사귀는 히로코라는 여자가 보았지만 신뢰할 수 있어.”

 “아, 스티브의 연구실에 같이 왔었다는 여자분….”

 “맞아”

 “후지사와가문의 사람들은 보지 않았겠지.”

 “아니.” 대답을 하며 에리카가 후지사와가문의 현황을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다.

 “어머니도 안 보셨고?” 시어머니 사타코를 말함이다.

 “아니.” 에이지는 기요세의 결핵병원으로 찾아 갔었다는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다 참는다.

 “에이지상, 그 일기 내게 주세요.”

 “응?”

 “그 일기는 아키라가 내게 남긴 것이라고 생각돼….”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이 말을 하며 에이지는 이미 결정은 났다고 느낀다. 일기는 아키라가 사랑하는 에리카에게 전해주라고 남긴 것이라는 생각이 명료하게 자리잡는다.

 “알겠어. 도쿄에 가자마자 특급우편으로 부칠게.”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나니 이야기가 막힌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산처럼 많지만…. 그래도 꼭 묻고 싶은 말은 있다.

 “에리카상, 코헨 교수와 정식으로 결혼했나?”

 이 말에 모처럼 작으나마 에리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오른다.

 “네… 쭈욱 같이 살다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것은 2년밖에 안돼요. 하지만 아키라와 이혼한 것은 오래됐어….”

 “그랬구나….”

 둘은 남은 와인을 마신다. 에리카의 관심이 코헨으로 가기 전에 에이지는 한마디 더 묻는다.

 “혹시 요코다 도시오라는 이름 들어 봤어?”

 “요코다 도시오… 글쎄 전혀 기억이 없는데… 그 사람이 누구예요?”

 에이지는 차마 아키라가 청부살인 시킨 사람이라는 말을 못한다. 머뭇거리다 “아마 아키라군의 일기에 등장할 거야….”

 이때 마침 코헨이 돌아온다. 역시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다나카상, 제가 피자를 아주 잘 만드는데 같이 드십시다”라고 저녁식사를 권한다.

그러나 여기 남아 피자 먹을 기분이 아니다. 완곡히 사양한다. 에리카가 에이지를 호텔까지 가이드해 주기로 한다. 동네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오르니 퇴근시간이어서 각양각색의 차들이 붐비고 있다. 보스턴을 두르는 환상도로 128번 도로다.

 “미국생활 어때?” 에이지가 침묵을 깬다.

 “미국은 젊은이의 나라라고 느껴져. 나이가 드니 너무 외로워. 때로는 도쿄의 길이 터질 것 같은 인파가 너무 그리워….”

 차는 어느덧 보스턴에 가까워 오고 다시 찰스강을 건넌다. 석양을 받은 보스턴의 백베이는 황금빛 석양의 반사광과 붉은 벽돌집들로 고서적의 그림같이 빛나고 있다.

 “에이지상, 아키라의 비밀 푸는 것 도와 줄 거지?”

 “그럼….”

 “일기 읽으며 수시로 연락할게요.”

 “오케이.”

 “사요나라.”

 “사요나라.”

 찰스강을 건너 호텔에 이르는 시간이 왜 그리 짧은지 차에서 내리는 에이지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게 외롭고 억울하다. 마음 속에 그리던 에리카와의 이별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차도에 내린 에이지는 에리카가 몰고 간 차를 멀리 쳐다본다.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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