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TV를 대체할 차세대 규격으로 HDTV 규격 논의가 본격화되는 1980년대에는 도쿄올림픽 때부터 개발해온 일본의 HDTV 규격인 MUSE(Multiple Sub-Nyquist Encoding) 방식이 세계적으로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업계의 전문가들 대부분은 HDTV가 추구하는 고화질·고음질 실현에 회의적이었다. 당시의 기술로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함에 따라 방송가능한 수준(19Mbps)으로 데이터를 압축하는 기술 개발도 난항을 겪고 있던 중이었다.
결국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신념아래 연구실에서 두문불출하며 디지털TV의 기술 및 시제품 개발에 열을 올렸다.
나의 연구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두자 전자업계의 가장 큰 전시회인 1990년 동계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에 시제품을 출품해 디지털 TV의 가능성을 증명하기로 했다. 그런데 CES를 하루 앞두고 출발하는 당일까지도 마지막 커다란 문제점 하나가 해결이 안돼 디지털TV의 화면은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전시회에서 마주칠 비웃음과 나의 경력에 일생일대의 오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속에 빠졌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섬광처럼 해결 방안이 떠올라 근처 전자제품점인 라디오 샤크에서 부품들을 구입해 밤새 시제품을 손보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CES 당일 시제품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 디지털TV 특유의 선명한 화면을 재생했고 결국 풀 디지털방식에 대한 지지를 넓혀 나가는 토대가 됐다.
이후 HDTV 방식 결정을 위한 FCC 자문위원회의 시스템 방식에 대한 제안서 제출을 앞두고 상사에게 일주일의 시한을 허락하면 기한이내 제안서를 작성해 마감일까지 제출하겠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여러 사람이 몇 개월을 준비해도 힘든 일이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결국 제안서 작성을 짧은 기간 내에 완료했다. 그리고 100여 명의 전문가가 모인 자리에서 성공적으로 시스템을 시연해 FCC에 기제안된 5개 방식 중 3개 방식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 TV 예술과학아카데미는 디지털TV에 대한 오랜 기간의 연구 성과를 인정해 1996년 내게 ‘에미상’을 1996년 시상했고 1997년에는 미국의 전국 일간지인 USA투데이에서 나를 ‘디지털TV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MIT 졸업 후 첫 직장인 퀄컴 창업자이자 현 회장인 어윈 마크 제이콥스가 설립한 LINKABIT에서도 있었다. 고객 업체인 HBO를 방문해 비디오 스크램블기술인 비디오 사이퍼(Video Cipher) 개발 가능성을 의뢰 받았을 때 비디오 스크램블링에 대한 지식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기본 원리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엔지니어의 감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수락했다. 개발 착수 후 단 4개월 내 10여 개의 경쟁업체와 시제품을 공동 시연한 결과 내가 개발한 제품만이 성능 테스트를 통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때 개발한 비디오사이퍼기술은 미국 케이블방송의 스크램블방식의 기원이 됐고 지금도 CNN, HBO, ESPN 등 미국의 주요 방송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당시 내가 보여준 성과는 방송·통신장비 관련 주요 업체인 GI사가 내가 이끌던 개발 조직 전체를 인수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