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 업]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 진병팔 지음 청년정신 펴냄

 ‘여명의 경복궁, 칼을 뽑아든 한 무리의 괴한들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북쪽 뒤편에 위치한 건청궁 옥호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여인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괴한의 칼질에 이어 두 번째 괴한이 휘두른 칼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녀는 부릅 뜬 눈으로 괴한을 쳐다보며 숨을 거둔다. 하지만 다른 칼들은 멈추지 않고 죽은 여인의 몸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으니….’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경, 행동대인 20여명의 괴한들은 일본 경찰·군인·일단의 조선군 훈련대로 구성된 소위 낭인으로 불리는 일본 자객들이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한 여인은 여홍 민씨, 이름은 정호. 명성황후였다. 작전명은 ‘여우사냥!’

 우리의 가슴 속에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악감정의 응어리를 심어놓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하지만 우리는 그 사건의 실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들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 그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녀의 가슴을 찔러 피에 젖었을 그 흉기가 지금 일본의 한 신사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 제목만 얼핏보면 무협소설 또는 역사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 책은 ‘한반도의 흔적을 찾아 떠난 일본 산책’이라는 독특한 컨셉트로 일본을 탐색해보는 일본 기행서다.

 저자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사용했던 일본도를 보관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를 비롯, 다자이후·시모노세키·가라츠·아리타·나고야 등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관련이 많았던 현해탄과 접한 일본의 도시와 유적지들을 돌아보면서 일본 땅에 남아 있는 한반도의 흔적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일본 정체성의 뿌리를 밝히고 한일 양국간 관계에 대해 냉정하게 모색해보자는 것이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다. 물론 이 책은 정색을 하면서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문화를 다루지는 않는다. 일반 여행자들처럼 가벼운 배낭을 짊어지고 바람처럼 관련 유적지를 휘돌 뿐이다. 그럼에도 여타의 기행산문이나 에피소드처럼 읽히는 와중에 숨겨진 역사의 진실들이 얼굴을 드러낸다.

 특히 좀처럼 볼 수 없는 사진들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국인에게는 처음으로 사진촬영을 허락한 ‘문제의 일본도’ 사진이 바로 그 중 하나. 저자의 간곡한 부탁과 설득으로 공개된 명성황후를 시해한 그 흉기는 그동안 존재 여부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칼은 손잡이를 포함해 1m 정도의 길이. 칼집의 한 면에는 시해 임무를 마친 후 칼의 주인이 써 넣었다는 문구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 문구를 그대로 풀어보면 이렇다. ‘한순간에 번개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 칼은 그렇게 그날 새벽의 ‘여우사냥’을 묵묵히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구시다 신사에 맡겨진 그 흉기의 모습과 주인이었던 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인 도오 가츠아키에 얽힌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의 이면을 드러내는 서술은 오늘의 일처럼 생생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처럼 증오의 역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백제와 한 나라 같았던 시절이 있었고 임진왜란이라는 피의 역사를 극복하고 260여년 동안 친선과 우호를 다졌던 조선통신사와 일본 국왕사로 대표되는 시절도 있었다.

 이 책은 ‘고구려의 삼족오가 일본 축구대표 선수의 로고가 된 사연’을 비롯해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 일본인들’ ‘임진왜란 도자기전쟁이 남긴 이삼평의 자휘’ ‘학자가 아니라 성인으로 추앙되는 왕인 박사’ ‘백강전투에서 수만의 일본군이 죽은 사연’ 등 역사적인 사실과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일본 열도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의 흔적들을 소개한다.

 한편 도서출판 청년정신은 특별이벤트를 통해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3박4일 일정으로 독자들이 저자와 함께 일본 속의 우리 문화를 느껴볼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문의 (02)3141-3783

  <김종윤기자 jy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