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용 블랙박스 시대 열린다

 ‘접촉사고 시시비비, 목소리 크다고 이기는 시대는 갔다.’

 접촉사고가 나면 운전자간 시비를 가리는 문제가 단순치 않다. 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광경은 흔한 사례. 여자 운전자의 경우 우악스런 남성의 큰 목소리에 주눅들기 일쑤다.

 이제 이런 사고 사후처리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자동차의 운행기록, 교통사고 정황을 저장해두는 ‘차량용 블랙박스’가 속속 상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차량용 블랙박스는 항공기 사고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비행기 블랙박스와 유사한 운전기록장치다. 다가올 e카시대에는 교통경찰과 보험사 직원이 현장으로 출동해 사고 차량 내부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증거자료로 수거하면 끝난다.

 택시나 트럭에 장착된 기존 아날로그식 운행기록계(타코그래프)가 차량의 주행속도와 거리만 기록하는 데 비해 차량용 블랙박스는 지난 1년의 차량운행기록을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할 뿐만 아니라 사고 전후 수십초의 핸들 조향각도와 브레이크·가속페달·엔진RPM·전조등 작동 여부까지 기록하기 때문에 목격자가 없어도 사고 상황을 정확히 재구성할 수 있다.

 이 제품을 자동차에 장착할 경우 교통사고 책임 규명은 물론 운전자 스스로 블랙박스 기록을 의식해 난폭운전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 일본·유럽에서는 고급 승용차와 특수상용차를 중심으로 보급이 시작되는 추세다.

 자동차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표준화 안을 마련 중이며 현재 일부 상용차에는 장착 의무화도 추진 중이어서 내년께는 세계적으로 시장이 크게 열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도로교통법 개정에 따라 대형 트럭·버스 등 전국 사업용 차량 40만대에 운행기록계 부착이 의무화된 가운데 더욱 상세한 운전정보를 저장하는 디지털블랙박스 제품이 출시돼 보험사·렌터카·운송업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이 주축이 돼 표준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블랙박스를 차량에 설치하면 교통사고율이 현저히 감소하는 데 주목한 자동차보험업계가 고객들에게 블랙박스 장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서는 등 시장 활성화의 계기도 마련되고 있다.

 블랙박스에 저장된 운전기록은 보험사 측에 교통사고의 과실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교통사고와 관련한 보험사기극도 대폭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고객별 운전스타일에 맞춘 보험상품을 기획할 수도 있다.

 때문에 일부 자동차보험회사는 블랙박스를 장착한 자사 고객에게 보험료 할인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삼성화재는 자사 텔레매틱스 단말기에 블랙박스 기능을 내장해 고객에게 보급할 예정이다.

 카스포·e카·세풍전자·모비콘 등이 차세대 블랙박스 보급에 나서고 있는데 관련시장 규모가 향후 2년 내 500억∼600억원대에 이를 전망이다. 카스포는 이미 국내 상용차·버스 등에 총 9000대를 납품한 상태며 중국시장에도 연내 2만대의 화물차에 장착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내년에는 승용차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e카는 올 10월 현대 상용차 적용을 시작으로 승용차에도 확대적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블랙박스의 운행기록이 실제 교통사고시 증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표준규격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또 블랙박스에 저장된 운행기록이 사생활 침해에 이용되지 않도록 제도적 보완도 시급하다.

 블랙박스는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자를 법률적으로 보호해주는 새로운 차원의 안전장비기 때문에 향후 에어백·ABS브레이크에 이어 대중화 가능성이 높은 차량 옵션으로 평가된다.

 e카 김영환 사장은 “향후 차량용 블랙박스는 무선통신망과 연계돼 사고 발생시 사고정보가 운영센터로 자동통보되고 119 및 구난차 연결 등 응급구난서비스의 지원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며 “텔레매틱스시장과 함께 블랙박스시장도 성장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명승욱기자 swmay@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