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26)더 깊은 비밀속으로

 지난 줄거리:미국여행에서 돌아온 다나카 에이지는 자신이 전전공사(JTT의 전신)에 입사할 당시 인사부장이던 하세가와 지로라는 노인을 만나 후지사와 아키라에 관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1999년 6월 20일

 도쿄 신바시

 

 “죽음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니요? 그러면 아키라군과 관련하여 또 다른 죽음이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에이지는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 묻는다.

 “…….”

 노인은 말없이 담배를 피울 뿐이다. 한동안의 침묵이 지나간 후 노인이 입을 연다.

 “자네는 뭐를 전공했나?”

 “전기공학입니다.”

 “그러면 JTT에서는 주로 무슨 분야에 있었어?”

 “네. 주로 회선교환기 관계가 경력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 그렇다면 금융이니 노무니 하는 사무계 일에는 관심이 없었겠구만.”

 사무계란 인문사회계 출신의 비기술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네.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기술계 출신이라도 사무계까지 두루두루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지요. 그래서 제가 출세를 못한 게 아닌가 합니다.”

 노인은 자조적인 말을 하는 에이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무튼 말이야, 자네가 후지사와 아키라군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금융이니 노무니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할 게야.”

 “하세가와상,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별로 없어. 나도 바쁘게 살며 남의 뒷조사를 전문적으로 할 시간은 없었어. 다만 오랜 경험을 통한 직관과 상상력은 있었지만 말이야. 인사부장을 오래 하다보니 관상 보는 데도 어느 정도 도가 트이더군…….”

 

 이 때 문 밖에서 기척이 나더니 오카미(여주인)가 들어온다. 백발에 가까운 머리는 단정히 쪽을 틀고 감색의 기모노를 입었는데 몸 움직임이 기민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육십은 훨씬 넘었으리라. “하세가와상, 얼굴 잊어버리겠어요”하는데 둘 사이가 오랜 지기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아, 내가 이집을 수십년 다녔는데 이제 은퇴할 때도 됐지.”

 여주인이 음식을 놓고 나가자 “이집에 다니신 지가 오래 된 모양이지요”하고 에이지가 묻는다.

 “그럼. 내가 노무과장을 할 때부터이니 한 사십년 되었나…….”

 에이지는 이 말에 귀가 번쩍 트인다. 노무과장을 하고 인사부장을 역임했다면 이 사람은 아마 JTT의 인적사항에 관하여는 자세하게 꿰고 있었으리라. 아키라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하세가와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아까 말씀하신 또 다른 죽음 이야기입니다만…… 얼마나 더 있는 겁니까.”

 “자네 참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이구만.”

 “…….”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내 직관으로는 한두건에 그치는 것이 아닐거야.”

 에이지는 이 말에 숨이 막힌다. 그렇다면 아키라가 사람을 여럿 죽이거나 청부살인을 했다는 말인가? 노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네는 회사에 충성을 바쳤는가?”

 “글쎄요…… 남이 한 만큼은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특히 유별난 것은 없었다고 봐야겠지요.”

 “인사부장을 오래 하다보니 회사에 대한 사원의 충성도는 각인각색이라는 것을 알았어. 각자의 성격이 다르듯이 말이야…….”

 

 술은 어느덧 차가운 냉주에서 뜨거운 아츠캉으로 바뀌었다. 술맛을 한참 음미한 후 하세가와는 입을 연다.

 “일본인같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인종은 없어.”

 에이지는 조용히 듣기만 한다. 노인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회사 경영을 좀 잘못했다고 간부가 여관에 가서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하는 나라를 본 적이 있나?”

 “그러고보니 없겠는데요…….”

 “과로사라는 말도 일본제야. 유럽에서는 연간 근무시간이 2000시간도 못되는데 더 놀겠다고 난리고…… 일본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치고 과로로 죽기까지 하니 말이야.”

 “그러고보니 일본의 회사란 공동묘지네요.”

 에이지의 농담에 노인은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다.

 

 “후지사와군의 비밀도 회사에 대한 충성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죽던 죽이던 어느 쪽도 말이야. 내가 볼 때 후지사와군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어. 돌아갈 따스한 가정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회사가 인생의 전부이고 회사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겠지…….”

 에이지는 이야기의 물꼬가 어디로 흘러갈지 그저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을 따름이다.

 “자네 JTT가 민영화될 때 어디에 있었나?”

 “네…… 이시카와(石川)현의 가나자와시에 근무하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데 있었군.”

 “네. 일본해에서 바다낚시도 많이 하고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흠…… 하지만 그때 JTT 본사는 아수라장이었어…….”

 “아수라장이었다니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던 공사가 민영화되어서 주식회사로 바뀐다는 것은 한마디로 환골탈태야. 조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거지. 그속에서 무엇이 가장 격동적으로 바뀌겠는가? 바로 이해관계야…….”

 “그렇겠군요.”

 “1985년의 민영화는 JTT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해야겠지. 자네도 알겠지만 통신사업이란 엄청난 투자와 연구개발이 필요한 사업이야. 또한 국가안보에 중요하고 말이야. 따라서 어느 나라나 정부가 국영기업을 통해 통신사업을 영위하지 않았나. 이 커다란 조류가 바뀐 것이 1980년대 초 미국, 영국에서 시작된 민영화의 물결이었지.”

 “소위 빅뱅이라고 하는, 미국의 AT&T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민간회사로 바뀐 사건이군요.”

 “그렇지. 아무튼 그 민영화의 물결은 일본에도 밀려왔어. 이 물결이 일본에서 때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집권 자민당이 스스로의 보수성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추진하던 행정개혁 덕분이었지. 다시 말하면 JTT의 민영화는 자민당 행혁(行革) 프로그램의 메인 이벤트가 되어버린 셈이야.”

 

 에이지는 이 지적인 대화에 오랜만에 신선한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인 물결속에서 아키라가 사건들에 연루되는 이야기의 전개를 감지하게 된다.

 “자네, 소카이야라는 말 알지?”

 “네. 단어 자체야 알고 있습니다.”

 소카이야(總會屋). 일본기업의 주주총회에서 특정한 이익집단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입장을 대변해주는 업자를 말한다. 필요하다면 가차없이 폭력을 동원해야 하고 따라서 배후에는 조직폭력단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JTT도 민영화되니 주식회사로 태어난 거야. 사원들은 앉은 자리에서 준공무원에서 샐러리맨으로 바뀐 것이고.”

 “그렇군요. 저도 그때 신분의 변화로 여러 규정들이 바뀌고 했던 게 생각납니다.”

 “사원 20만명이 넘고 인구 1억2000 이상의 일본이라는 나라에 전화 그리고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JTT는 문자 그대로 맘모스 회사가 된 게야. 따라서 엄청난 이해가 새로이 판을 짜게 된 거지. 특히 새로이 태어난 거대기업의 주식은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 물론 다수의 지분은 정부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론대로라면 장차 경영권이 민간에 넘어가는 것은 정해놓은 코스라고 할 수 있었지.”

 “그렇겠군요.”

 

 “새로이 태어난 JTT의 경영진은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완전한 경영권을 행사하고 싶었지. 표면적으로는 주식회사가 되었지만 이들의 의식은 아직도 국영기업의 간부였어.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자부심에도 변화가 없었고 말이야.”

 “주식회사란 주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조직 아닙니까?”

 “그렇지. 그게 바로 문제였어. JTT의 경영진이 민영화가 된 후 가장 두려워한 것은 두가지였지. 하나는 과거의 준공무원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통신의 통자도 모르는 인간들이 주주랍시고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어.”

 “따라서 소카이야를 매우 경계했겠군요…….”

 “그렇지…….” 노인은 여기까지 이야기한 후 우둔한 제자가 이제 뭘 좀 알아듣는다는 표정으로 에이지를 쳐다본다.

 

 그렇다면…… JTT의 주주총회에도 소카이야라는 파리가 끼었고 이를 처리하는 데 아키라가 동원되었다? 에이지가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데 이를 들여다 보았다는 듯이 하세가와가 내뱉는다.

 “민영화 당시에 자네가 가나자와라는 좋은 지방도시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을 때 우리의 후지사와 아키라군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글쎄요…… 당연히 본사에 있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하며 에이지는 마음속에서 ‘아하!’하고 깨닫는 것이 있다.

 드디어 오늘의 수업이 끝났다는 표정으로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인다.

 “오늘 술값은 자네가 내게. 나는 이집에서 돈 내고 술이나 밥 먹은 기억이 별로 없어”라고 한다. 회사의 대선배를 대하는 에이지의 표정은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급하다. 엄청나게 많은 숙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과도 같이.

sjroh@alum.mit.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