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JTT의 인사부장이던 하세가와를 만난 다나카 에이지는 아카라가 또 다른 청부살인에 연루됐을 것 그리고 그 계기가 전전공사의 JTT로의 민영화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1999년 6월 28일
도쿄대학
도쿄대학의 메인 캠퍼스라 할 수 있는 홍고(本鄕) 캠퍼스로 들어가는 아카몽(赤門)은 지금 보아도 마음이 설렌다. 굵은 기둥을 붉은 색으로 칠해 놓은 아카몽은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의 요람이자 출세길의 상징인 도쿄대학의 심벌이기 때문이다. 지방의 갑남을녀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쿄대학에 합격했을 때 에이지의 마을에서는 촌장이 파티를 열고 난리가 났었다. 다다미 가게를 하던 부친과 도시락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모친을 모시고 입학식에 참석하러 이 아카몽을 들어설 때 즐비한 승용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보고 에이지는 기가 팍 죽었었다. 34년 전의 일이다.
사회과학연구소는 아카몽을 들어서 산시로 연못으로 가니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에이지가 학교를 다닐 때부터 있던 오랜 건물에 간판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현관을 들어서 안내판을 보니 교수 히하라 아쓰시 334호라고 적혀 있다. 대학교 동기생인데 알아보니 일본통신산업사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권위자라는 것이다.
334호실의 문을 노크하니 베니어 합판의 문짝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리는 느낌이다. ‘하이’하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대편의 창문은 보이는데 담배연기가 하도 자욱하여 사물이 안 보일 정도다. 눈동자가 적응해 실내를 둘러보니 구석에 큰 책상이 있고 히하라가 파이프를 문 채 컴퓨터를 보고 있는데 마치 컴퓨터의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이, 히하라군. 오랜 만이네.”
“야, 이게 누구야. 에이짱?” 에이짱이란 에이지의 학창시절 별칭이다.
“자네 매일 라면만 먹더니 대도쿄대학의 교수가 되고 사람팔자 알 수가 없군.”
“야 이 사람아, 그래도 공부는 내가 더 잘 했어.”
둘은 오랜 만에 젊은이로 돌아가 농담을 나눈다. 둘은 같은 하숙집 출신이다.
야마구치현에서 온 히하라도 가난한 집의 아들이어서 둘은 늘 쪼달리며 상부상조하며 겨우 대학을 졸업한 터다.
“자네 담배 엄청나게 피우는 모양이군.”
“어 꽤 피우지. 도쿄대학의 교수라면 세간에서는 대단히 멋있고 재미있을 거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따분한 생활이야. 물론 매스컴에 타는 것을 밝힌다거나 교수직을 이용하여 사교에 열심인 사람들은 예외이지만. 나는 여기서 이렇게 책이나 읽으며 담배를 죽이고 있지.”
히하라의 말은 자조적이지만 교수직과 연구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역시 세월이 지나도 사람의 기본적 색깔에는 변화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 자네는 어떻게 지내나?”
“나는 별로 재미없어. 대학 졸업하고 전신전화공사 그러니까 지금의 JTT에 들어가 쭉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최근에 퇴사해 버렸네.”
“그래…”
히하라가 타준 미지근한 오차를 한 모금 마시고 에이지가 입을 연다.
“자네 내가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후지사와 아키라군 생각나나?”
“생각나다뿐이야? 대학졸업하고 나서도 가끔 만난 적이 있지. 내가 일본통신산업사를 전공하는 사람 아닌가?”
“그렇겠군. 그럼 그 친구의 자살소식도 알고 있겠구만”
“알지. 물론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사실은 말이야. 그 친구의 자살이 도저히 납득이 안가고 우리 둘의 우정도 있고 해서 내가 그 미스터리를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어.”
“허… 그런데?”
“누군가가 말하는데 그 친구가 전전공사의 민영화과정에서 매우 미묘하고도 어려운 입장에 있었을 거라는 거야.”
“미묘하고 어려운 입장이라… 무슨 의미에서이지?”
“공사를 주식회사로 바꾸는데 주식문제라거나 노조문제라거나….”
“허어…. 그거 아주 재미있는 문제인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 전전공사가 JTT로 출범한 것이 1985년 4월 1일인데. 그때 후지사와군이 어디 근무했나?”
“전전공사의 황제로 불리던 안도 총재의 비서실에 있었어.”
“그래?” 히하라의 놀라는 목소리에는 수재이던 후지사와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전부터 있던 껄끄러운 감정이 묻어 있다. 에이지는 후지사와와 히하라의 양측을 연결하는 친구이지만 히하라는 학창시절 돈많고 여자에게 인기있던 후지사와에게 늘 위축되고 소외되는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말 나온 김에 전전공사 민영화에 대해 좀 설명해봐. 나는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지만 그때 지방에서 엔지니어로 있었기 때문에 큰 그림을 모르겠어.”
“자네가 나를 찾아 온 이유를 이제 알겠구만.”
“설명 잘하면 술 한잔 사는 건 문제가 없어 이 사람아.”
히하라는 일어서더니 벽에 걸린 작은 흑판으로 가 백묵을 집어든다. 지금도 백묵을 쓰나 에이지는 신기하기 그지없다. 생각을 정리하더니 히하라가 강의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힘없는 골초에서 눈이 빛나는 프로로 바뀐다.
“소위 전전공사로 불리던 일본전신전화공사가 주식회사 JTT로 바뀐 사건은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내가 볼 때 가장 타당한 해석은 일곱 당파의 동상이몽야.”
“일곱당파의 동상이몽? 자네 지금 무슨 소설 쓰나?”
“들어봐. 물론 이 JTT로의 민영화는 시대적 조류의 산물이었어. 하지만 왜 1985년이라는 특정한 시점에서 그러한 특정한 형태로 귀착이 되었는가를 설명하자면 일곱당파의 동상이몽이라는 화두가 최고라는 말이야.”
“누가 일곱당파인가?”
“음… 임시행정조사회, 대장성, 우정성, 전전공사, 노조, 전전패밀리, 그리고 산업계 전체야.”
“아니 JTT 민영화가 그렇게 거창한 일이야? 마치 일본사회 전체의 개혁이라도 하는 모양이구만.”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이 일곱개의 이해득실의 덩어리가 같은 침대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만든 것이 바로 JTT 민영화라는 이야기야.”
히하라 교수의 지론은 이렇다. 1980년대 초 전화사업은 이미 가입자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아날로그기술을 쓰는 음성통신에서 디지털기술을 쓰는 데이터통신으로 산업의 기조가 바뀔 여건은 성숙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업은 과거의 국영기업이 영위하기 적당치 않아 미국의 AT&T, 영국의 BT 등의 재편으로 이어진다. 이 통신산업의 재편은 당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 영국의 대처행정부의 자유주의 시장관과 합치하는 것이었다. 레이건, 대처 양 행정부는 마침 일본의 대보수정객 나카소네 수상과 통하는 면이 많았다. 레이건과 나카소네의 이름을 딴 ‘론-야스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을 지배하던 보수정당 자민당은 오래 전부터 행정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 기획하고 집행하는 총리직속기구가 임시행정조사회, 즉 임조였다. 1984년 미국이 일본에 대하여 경제자유화와 시장개방 압력을 넣자 거대 국영기업이자 떠오르는 통신산업의 운영주체인 전전공사의 민영화는 임조가 볼 때 최고의 선전가치를 지니는 메뉴였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돈을 주무르는 대장성으로서는 가지고 있던 전전공사의 주식을 처분할 때 엄청난 재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민영화가 완결되고 보니 당초 188억엔의 대장성 출자금은 540배로 불어나게 되었다.
통신산업을 관할하는 우정성 또한 전전공사의 민영화를 큰 기대를 갖고 추진하고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의 일본의 경제부흥 기간에 일본정부의 총아는 통상산업성이었다. 같은 경제부처이면서 이류부처의 열등감에 시달리던 우정성은 제조산업이 한물가고 정보통신산업이 부상하자 일류부처로 격상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거대 공사는 민간기업으로 바뀌는 것이 힘의 관계에 있어 더 유리한 것이었다.
전전공사로서도 민영화를 반대할 이유가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전화가입자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 상태에서 데이터통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민간기업체제가 더 발빠르고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이른 것이었다. 다만 노조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민간기업이 되면 소위 국영기업의 깨지지 않는 철밥통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전공사보다 앞서 민영화한 국철과 전매공사의 경우를 볼 때 민영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였고 그렇다면 민영화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노조에 유리한 조건을 더 많이 끌어내자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전전공사의 초창기부터 통신장비를 납품해 오던 기업들, 소위 ‘전전패밀리’에게 공사의 민영화는 새로운 사업기회를 의미하는 만큼 대찬성이었고 손이 닿는 국회의원들에 로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산업계 전반에 있어 전전공사의 민영화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연간 1조엔 이상의 공사를 발주하는 전전공사가 민영화하여 신규사업을 추진할 때 예상되는 기회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난 에이지는 전전공사의 민영화가 청부살인도 불러들일 수 있는 거대한 아수라장일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뜨는 에이지에게 히하라가 따라 나서며 어깨에 손을 두른다.
“그래 오늘은 술 안사는 거야?”
“내가 공부 좀 더 하고 다음에 와서 한 수 더 배우며 살게.”
사회과학연구소 건물을 나서는 에이지는 학자인 히하라에게 정치가 등이 관련되는 민감한 이야기를 물을 수 있을지 판단이 안선다.
sjroh@alum.mit.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