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안타깝다. 무엇이 그를 스스로 그 귀한 생명까지 끊게 했을까? 반도체산업 중에서 특히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진 고인의 결정으로 KAIST에 기증된 CHiPS 건물은 지금 우리나라 반도체설계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위해 매우 값진 자산으로 남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수많은 공학도들이 지금 여기서 자라고 있음을 고인 조사의 한 자락으로 바치면 그나마 약간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대개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서게 되지만 부모와 스승을 빼고는 이런 일방적인 관계가 많지 않다. 내가 지금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고인이 반도체산업을 이끌고 가는 동안 내게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나는 이제 영원히 그분에게 직접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패기에 차고 갖춰진 한 인생이 허무히 끝나는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 회장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나는 멀리서 좋아하고 존경하던 한 사람을 잃었다. 반도체 말고도 고인과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는데 고인은 서둘러 우리를 떠났고 나는 영원히 빚진 자가 되었다.
너무나 아쉬운 것은 그만큼 여건과 자질이 잘 갖춰진 사람마저도 바로 서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비판하고 짓누르는 사회가 아니라 키우고 살리는 사회, 격려하고 세워주는 분위기를 우리 사회에 속히 만들어야 한다. 내가 반도체 분야에 종사한다는 전제하에 고 정회장에게 받은 것은 이제 이 땅의 전자산업을 이끌어 갈 후학들에게 갚을 수밖에 없다.
고인이 진두지휘하던 현대전자는 곡절 끝에 하이닉스가 되었고 지금 하이닉스는 여러 고비를 넘겨가며 분투하고 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뛰는 하이닉스가 자랑스럽고 모두가 같이 웃는 날이 오기를 나는 진심으로 믿고 기대한다. 요새 우리의 미래를 옥죄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나, 노사대치의 답답한 상황을 속히 해결하고 다시 세계의 정상을 바라보며 힘을 합해 나아가야 한다. 고 정 회장이 다 못 이루고 간 이 땅의 과업은 우리 기술인 하나하나가 모두 진실하고 겸손한 기술자로서 씩씩하게 일하며 살아감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진실하고 겸손했던 정몽헌 회장을 생각하며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본다. 정 회장님, 당신의 주위에서 당신에게 가한 모진 고문을 용서하소서.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우리를 모두 용서하소서. -경종민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