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 수상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희생자 묘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자신도 히틀러를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빌리 브란트는 이렇듯 진지하고 용기있게 독일의 과거를 사과하면서 독일의 위상을 드높여 놓았다. 빌리 브란트는 또 무수한 위협속에서도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국교수교, 동독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인적교류 확대 등 동방정책을 줄기차게 시행해 나갔다. 특히 동서독간의 경제교류시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동서독간 화폐가치의 차이를 무시하고 서독달러를 기준으로 교역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우리돈으로 약 67조원에 달한 손해를 정부와 기업이 나누었다.
정몽헌 회장의 비극적인 죽음앞에서 새삼 빌리 브란트가 떠오른 것은 화해와 공존이라는 전인류의 과제를 충실히 실천하여 정치경제적으로 세계정상급에 오른 독일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거니와 전인류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한없이 사무치기 때문이었다.
인건비 및 원부자재 절감비용 302억2000만달러, 한국 산업부문 생산유발 효과 188억6000만달러, 부가가치 유발효과 77억9000만달러, 북한이 얻을 수 있는 경제 효과 154억1000만달러…. 전경련이 발표한 ‘개성공단 개발의 경제적 효과’의 내용이다. 금강산 관광사업, 철도·도로연결사업과 함께 3대 경협사업으로 불리는 개성공단 개발사업이 지난 6월 착공식을 가진데 이어 경의선, 동해선 연결식도 진행되었다. 현대가 4억달러의 대가를 치르고 북측과 합의한 사업권의 내용은 더욱 놀랍다. 해금강 남단으로부터 원산에 이르는 해안지대 전체와 개성공단사업을 위한 2000만평 규모의 토지에 대한 50년간의 사용권을 획득했고 경의선, 경원선, 금강산선, 동해북부선의 철도사업과 시내외 및 국제전화, 인터넷과 이동통신 및 통신장비 등을 포함한 모든 통신사업, 전력사업, 비행장 건설사업, 금강산 수자원 이용사업, 임진강 유역사업, 주요명승지 종합관광사업, 통천공단 건설사업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사업들을 그냥 읽고 지나치면 안된다. 북한 지도를 함께 펼쳐 놓고 이 사업들을 상상해 보라. 햇볕정책과 그 성과로 얻어진 경협의 대가들이 남북을 얼마나 가깝게 만들고, 남북을 얼마나 풍요로이 만드는지 그려볼 수 있지 않은가.
비단 경제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성공단을 위해 수많은 남측의 기술자들이 파견될 것이고 그 몇배에 이르는 북측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할 것이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수만명의 남북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일하는 역사가 북측땅 개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성공단이 완료되면 입주한 1200여 기업에서 남북의 사람들이 함께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루의 노동을 위로하며 서로 어깨를 두드리는 상상도 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듯 남과 북의 경제협력이라는 것은 남과 북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일일 뿐더러 남북의 평화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남북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만나 신뢰를 쌓아가게 되는 중요한 매개다.
남은 정치군사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경제협력이 필요하고, 북은 개성공단 조성, 금강산 관광의 허용, 신의주특구의 조성, 7·1경제개선조치 등이 증명하듯 점진적 시장개방 상태에서 경협을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안타까워만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간 경협은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공기업과 정부가 경제협력을 모두 맡으라는 주장은 안된다. 이미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현대가 가진 기존의 사업권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민간기업들도 마음 놓고 경제협력 사업에 나설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그렇게 하기 위한 사회구성원들의 공감과 합의를 위한 노력을 이제라도 팔 걷고 시작해야 한다. 진지하고 용기 있는 자세로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임종석 새천년민주당 의원 imjs21@imjs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