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메이션코리아 이장우사장(5)

 고도의 경제발전기를 거치면서 우리 모두는 경제성장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겼으며 삶을 여기에 맞춰 살아왔다. 그러나 IMF의 시련은 혹독했다. 모든 것은 확장이 아닌 축소, 전진이 아닌 후퇴였으며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이었다.

 96년 7월 3M으로부터 분리된 이메이션코리아는 당시 두산그룹과의 지분정리가 되지않아 같은 해 11월이 되어서야 법적으로 독립법인이 될 수 있었다. 이익잉여금이나 조직의 경험, 노하우가 축적되기도 전인 창업 1년 만에 발생한 금융위기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당시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경영자가 일반적으로 더 많았다. 96년 10월께 국가가 파산위기에 봉착하고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울 당시 필자는 개인적으로 경제상황을 누구보다도 비관적으로 판단하고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시도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사무실 규모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사용하는 사무실 크기도 줄이고 일부 회의실도 없애는 등의 작업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접대비를 포함한 비용도 거의 반씩 줄여나갔다. 충무로 극동빌딩에 위치한 전시실 역시 많은 손실을 감수하고 정리했다. 부서규모도 축소하고 인원도 줄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비용적인 측면에서의 축소였을 뿐 중요한 것은 매출이었다.

 우선 수요가 늘지 않을 것이란 가정아래 중요 품목의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당연히 사내 반대의견도 있었고 심지어 이메이션 국제담당 책임자였던 데이브 웽크 사장까지도 너무 무리하지 말 것을 설득해왔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야말로 리더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평소 나의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무엇보다 미국식 경영의 핵심은 종국에는 결과만 보고 평가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외부의 어떠한 경영환경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부진하면 그 책임은 우리 한국팀이 떠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데이브 웽크 국제담당 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두에서 깃발을 휘둘렀다. 임직원들도 결국은 내 뜻을 잘 따라주었다. 하지만 원화의 엄청난 평가절하로 인해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한 우리의 영업실적은 전년도에 비해 엄청나게 떨어졌다. 예상대로 데이브 웽크 사장은 사업이 부진할 경우 한국시장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한국팀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창립 멤버인 배수철 이사, 한창준 이사와 함께 계량적 경영목표를 달성하는 길이었다. 결국 98년도 결산에서 전년대비 엄청난 수익과 이익률 증가라는 최고의 실적을 낼 수 있었다.

 그 어떤 프로세스나 시스템도 리더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 못지않게 정확한 사태파악과 그에 대한 과감한 결단이야말로 리더로서의 중요한 일임을 실감할 수 있었기에 하늘이 준 기회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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