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패러다임을 바꾸자](2)`기술직` 꼬리표를 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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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계의 본산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나와 나란히 공직에 진출한 A국장과 B국장. 두사람은 KAIST 동문의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큰 포부를 안고 공직생활을 시작, 순탄하게 승진을 해왔지만 요즈음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행정고시 출신의 ‘행정직’인 A국장은 행정능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는 데 반해, 기술고시 출신의 B국장은 능력은 인정받고 있지만 ‘기술직’이란 공직사회의 장벽에 막혀 수십년 공직생활중 최대 기로에 서 있다.

 기술직 꼬리표를 달고 1급 이상의 고위 공직자로 가는 길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공계 출신이라는 편견과 편협한 공직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산물이다. B국장은 “공직생활에서 이공계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자랑스럽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서자라는 인식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고 푸념한다.

 현재 공직사회에서 사무관을 거쳐 특정 부서의 기관장을 맡는 4급(서기관)의 반열에 오르면서 ‘기술직’이란 꼬리표는 족쇄로 작용한다. 정부 각 부처의 고위직에 포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기술직이 많은 연구개발(R&D) 관련 부처에서도 고위직으로 갈수록 갈 곳이 제한된다.

 행정의 전문성을 배려한다는 정부의 인사정책 기조로 인해 기술직들은 능력이 있더라도 평생 한 분야에만 머무르며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노비문서와 같은 기술직 꼬리표 때문에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실제 복지부는 의사와 약사 출신에게만 배정해놓은 보직이 따로 있는 등 직급에 따라 정부부처 보직 진출을 확연히 구분해 놓았다. 또 우리나라의 석유 및 석탄 등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산자부의 자원정책국은 아예 이공계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노른자 보직일수록 이공계 접근이 더 어렵다.

 이공계 출신이라는 전문성이 아예 그 정부 보직의 해당 직군 이외에는 업무 자체를 맡기지 않아 다른 분야로의 승진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도 이공계를 서자로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노른자 보직을 장악하고 있는 행정직들로 인해 기술직들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 전직시험을 통해 불편한 이공계 꼬리표를 떼고 행정업무로 전환하는 사례까지 발생한다. 기술직은 특히 직군·직렬구조가 복잡해 상위직으로 갈수록 소수직렬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

 적어도 관리자적 성향이 더 요구되는 4급이나 최소한 3급 이상부터라도 ‘기술’이니 ‘행정’이니 하는 직급의 꼬리표를 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보직의 선순환으로 전문성을 가진 기술직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행정직 역시 과학기술 마인드로 무장한 기술직들과의 경쟁을 통해 고급 행정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직급 통합이 선행돼야 한다는 논리다.

 “기술직들도 다양한 업무를 익혀 일반적인(general) 행정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데 현재의 공직시스템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공계가 고위 보직에 많이 진출한다면 더욱 과학적인 시각으로 정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미국 등 선진국으로 갈수록 공직자들의 이공계니 인문계니 하는 직급 구분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서울대와 KAIST를 나온 이헌규 국립중앙과학관장의 말이다.

 업무 특성상 모든 정부부처가 어렵다면 이공계 출신의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R&D부처만이라도 직급 구분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 고위 공직자는 “최근 교육부 기술직 국장이 교육부 시설국으로 발령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승진기회가 겨우 시설국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만두었다”면서 “사실 관리자급이 되면 직급 꼬리표가 별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KAIST의 홍창선 총장은 “조직 운영자가 전문가가 앉을 자리마저 개방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면서 “기술직렬을 만들지 않고, 만들어 놓아도 기술·행정 복수직으로 만들어 행정직이 더 많이 차지한다면 행정가를 꿈꾸는 우수한 이공계 인력들을 어떻게 공직으로 유인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4급 이상의 조기 직급 통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 윤진식 산자부 장관은 이와 관련, 최근 본지 주최 간담회에서 “행정수요를 감안하지 않은 직급 통합 등 급진적인 이공계 공직 확대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과학재단 김정덕 이사장 역시 “기술직을 배려하려 해도 재원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장기적인 차원에서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4급 이상은 ‘기술적 전문성’보다는 ‘정책적 전문성’이 더욱 요구되는 직위라는 점에서 조기에 일정 직위(서기관 또는 부이사관) 이상의 직급을 통합 운용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행자부 출신의 인사통인 과학기술자문회의 신문주 제2국정과제조정관은 “직급이 통합되면 기술직들에게는 정책능력 함양을, 행정직들에게는 과학기술 마인드 형성을 촉진하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홍창선 KAIST 총장

 “이공계의 공직 진출 확대를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의 선입견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공계인들이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나쁜 꼬리표로 작용한다면 공직사회의 개혁은 요원할 것입니다.”

 국내 이공계 최고 대학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홍창선 총장(59)은 “정부가 공직자 채용이나 선발시스템 등 모든 분야에서 과감한 수술을 해야만 이공계 공직 진출이 실질적으로 확대될 것”이라며 “고위 공직 진출에 균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직급을 일정 수준부터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인별 능력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능력차가 없는데다 불합리한 공직시스템으로 인해 특정 집단이 피해를 봐서는 안될 것입니다. 직무능력이 필요하다면 연수과정을 통해 배양하면 될 것입니다.”

 홍 총장은 “이공계가 모여 아무리 공직 진출 확대를 소리높여 외쳐도 소용없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는 뭔가 변화의 바람이 일 것”이라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정책 추진은 고급 엘리트층의 상당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제는 비판그룹의 의견과 겸허히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돌아앉아 버리면 정책 추진 자체가 힘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항간에 기술고시 인원을 늘리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용을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며 “특정 분야의 인력이 특권을 누리는 시스템을 확실히 뜯어 고치고 이공계 출신이 정책 결정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열어줘야 한다”고 항변했다.

 “공직사회는 강 행정직, 약 기술직의 구조가 수십년째 유지되고 있다”는 홍 총장은 “필요한 인력을 끌어오기 위해 정부가 공직진출 문턱을 낮추긴 했지만 둑의 한곳에 구멍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공계 인력 풀을 우선 구성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특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방직은 자리가 적은데다 대부분 공무원 출신이 장악하고 있고 이공계는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시스템 개혁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이공계의 직급별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는 “중국의 상무위원들도 전원 이공계가 차지하고 있다”고 상기시키며 “물론 문화혁명을 거치며 이공계가 자연스레 커온 점은 인정하더라도 우리나라처럼 공부 잘하고 똑똑한 학생이 법대로 몰리는 경우는 없었다”고 꼬집었다.

 홍 총장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2차대전 이후 과학기술을 국가 정책의 기조로 삼아 오늘날 원자력과 항공우주 분야 등에서 세계 최고를 구가하듯 우리나라도 제2의 과학기술입국의 초석을 다지는 차원에서 이공계의 공직 진출 확대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