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4월 초 약관 24세의 나이로 특허청에 부임하는 날, 당시의 안영철 특허청장님은 “이제 올 사람들이 왔구만!”하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공직으로 첫 보직을 받아 본격적인 업무에 나서기도 전에 좌절감을 느끼게 한 것은 행정직 5급호칭을 사무관으로 하는 반면, 기술직 5급은 기좌라는 해괴한(?)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또 기술직 공무원의 경우는 보직 부여에 제약이 많아 관료사회에서의 성장은 대단히 어려웠다. 같은 이공계 출신도 민간기업에서는 연구개발·영업·기획 등 분야에서 보직 관리의 제한 없이 최고경영자로 성장하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그 후 여러 이유로 함께 관료로 입문한 과학원 출신 동기생들은 모두 그만두고 현재는 대부분 대학교수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료사회의 구조는 기본골격이 일제시대, 멀게는 조선시대로부터 유래된 것이지만 우리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행정고시 중심의 인사제도는 나름대로 장점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나는 국가를 위해 하는 일은 무엇보다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직책이건 국가발전을 위한 중요한 자리임에는 틀림없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믿었다. 소위 특정 고시 기수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행정부내의 인적 네트워크는 약하지만 나름대로 더 열심히 적응노력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은 맡은 자리에서 항상 혁신적으로 생각하고 산업계의 고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즉 행정서비스의 대상인 시장에서 부단히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심사관 생활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몇개의 캐비닛에 보관된 오래 된 외국기업의 특허출원 서류를 심사해서 1년만에 정리했던 일이다. 전임자들이 10년 가까이 묵은 사건의 심사를 미룬 이유는 이들이 특허등록이 되면 유치단계의 우리 산업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국내 기업들이 수출 산업화를 위해 이미 이들 기술에 대해 특허실시료를 대부분 지급하고 있기에 특허심사를 종결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컬러TV와 VCR을 생산하던 가전 3사를 방문하여 당시 사용기술들을 확인하고 특허심사 절차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2년여 후 상공부로 발령받은 나는 가전산업 담당 계장이 되었다. 이 때 컬러TV의 시판과 방영, 이어진 VCR산업의 초기단계에서 핵심부품의 국산화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상공부와 업계 공동으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가전 3사 현장과 부품업체를 순방하면서 부품 공용화를 통한 경쟁력 제고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또 일본업체의 VCR 핵심 특허기술 이전 기피를 극복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도 강구했다. 이 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우리 전자산업은 가전품에서부터 반도체, 컴퓨터, 통신기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