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백만기 변리사(3)

 1982년 봄 우리의 수출 주력으로 자리잡아가던 컬러TV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 조치가 내려지면서 우리 전자산업은 대미 통상마찰의 위기에 선다. 이 때 나는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의 MBA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정부에서건 민간에서건 이공계 전공자가 MBA를 하는 것은 기술과 지식이 경제의 중심이 되는 다가오는 시대에 대단히 유용한 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술과 경제, 경영의 결합은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요체가 아니던가?

 필라델피아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국산 컬러TV를 사는 일이었다. 내가 육성하려고 한 컬러TV가 미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는데 국산은 저가품의 대명사 바로 그것이었다. 국내에서는 리모컨 제품도 많이 출시됐지만 미국에서는 로터리 방식의 저소득층용 제품이 고작이었다. 나는 우리의 전자산업이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갈 길이 멀다고 느꼈고 정부의 정책도 기술혁신에 좀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학기간중에는 앨라배마의 컬러TV 공장 기공식에도 참석했고 64K D램의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84년 5월 귀국, 상공부 정보기기과에서 컴퓨터산업 육성 업무를 담당했다. 이 때의 정책 현안은 IBM의 한국 투자에 대한 것이었다. IBM의 투자는 필연적으로 유치단계의 국내 PC산업을 붕괴시킬 것이라는 논리와 우리 PC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논리가 팽팽히 맞섰다. 당시 IBM은 한국 투자를 통해 일본에서 개발한 5550 기종을 생산을 하는 것으로 결말지었지만, 호환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서 그다지 성공적인 투자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IBM의 투자로 이후 한국은 세계적인 PC생산기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IBM의 투자를 계기로 국내업계에서는 신기술의 공동 연구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산업유치 단계의 국내 기업이 다국적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같은 민관협동체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나는 업계를 뛰어다니며 연구조합 설립의 필요성을 설득해 전자조합에서 일하던 현호중씨를 사무국장으로 영입했다. 이 조합은 후일 PC로부터 중형컴퓨터 개발에 이르는 연구조합으로 기능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던 어느날 공직생활 9년만에 과장 승진이 되었다. 특허청의 전자심사과장 자리였다. 차수명 특허청장은 우리의 기술입국을 위해 특허행정의 선진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우리 지재권의 법제를 국제기준에 맞추고, 세계적 수준의 국제특허연수원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나는 그 때 국제특허연수원의 실무 기획팀장을 맡았고, 설립 이후 초대 교수로서 전국 방방곡곡의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기업의 특허인식을 제고시키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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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80년대 전자산업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우리 지재권의 법제를 국제기준에 맞추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국제특허연수원에서 초대교수로 임용돼 기업을 대상으로 특허관련 강의를 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