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들어서 한미간 반도체 통상 마찰은 더욱 심각해졌다. 마이크론이 한국 반도체 3사를 상대로 반덤핑 소송을 제기했다. 이 때 나는 반도체산업과장으로서 반덤핑 대책 수립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 일이 마무리 되자 언론에서 ‘미스터 반도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해 10월 예비판정에서 국내업체는 무려 80% 수준의 덤핑 마진을 받았다. 이것이 확정되면 우리업체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컬러TV·VCR 등의 성공으로 간신히 투자자금을 마련해 반도체에 전력투구했는데 주력시장인 미국에서 문제가 생기면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이 사건은 국가적으로도 너무 중요한 과제이기에,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해야만 했다.
93년 3월 최종판정 때까지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부시에서 클린턴 정부로 바뀌는 전환기였기에 누구도 책임있는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웠다. 이 사건은 국제적 관심을 모았고 연일 OECD와 같은 국제기구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스와 같이 외국 언론에서도 인터뷰 요청을 해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정부도 일본의 전례를 따라 반도체 협정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덤핑 마진률을 낮추는 쪽으로 노력했다. 최종판정에서 1% 미만의 마진을 받아 실질적으로 반덤핑 조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한 미 대사관과 한국 정부가 유례없이 긴밀히 협조하여 대응해 나갔다는 점이다. 당시 일등 서기관이던 딜레이니씨는 그레그 대사의 명으로 자국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딜레이니씨는 과거 국무부 관리 시절에 미일 반도체 협정을 담당한 바 있어 세계 반도체산업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문을 닫으면 자국 컴퓨터업계가 큰 어려움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나는 정보기기과장 시절에 긴밀하게 유대를 맺었던 IBM 등 미국 컴퓨터업계 관계자와 워싱턴에서 만나 미국 컴퓨터산업계를 위해 상무부를 설득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상무부 관계자와 협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보니 딜레이니씨의 전화가 와있었다. 그레그 대사에게 온 전문에 의하면 상무부의 과거 부정적인 자세가 변하는 것이 느껴지는데, 워싱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 반도체업계는 64M와 256M DRAM 시대로 새로운 도약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최종판정 직후 자존심 강한 일본 통산성 반도체담당관이 우리를 방문해 세계 반도체산업 정책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례적인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업계가 반덤핑 조치를 벗어난 데 대해 충격을 느낀 듯했다.
mgpaik@ip.kimch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