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신질서를 만들자’
1·25 인터넷 대란, 미국에 종속된 인터넷 기반 체계, 전국민이 벌이는 스팸과의 전쟁, 기승부리는 인터넷 사기, 청소년 게임 중독, 사이버와 현실의 혼동… 인터넷의 유용함 만큼이나 그로 인한 부작용과 역기능이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 82년 연구목적의 인터넷이 국내에 처음 도입된 이후 우리나라는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인터넷 분야에서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특히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던 인터넷은 93년 월드와이드웹(WWW)의 등장으로 우리나라는 10년만에 전국민의 60% 이상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1600만 가구 중 1000만 가구에 초고속 인터넷이 깔려있는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같은 물리적인 성장에 비해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풍부함, 인간사회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은 부족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은 물리적인 인프라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면 향후 10년은 이 같은 기본적이고 총체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가는 소프트웨어(SW)적인 부분에 주력해야 한다는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높다.
자녀 둘을 키우는 주부 김숙경(여·42)씨는 게임에 빠져서 공부를 소홀히하는 것은 물론 가족과 대화조차 뜸해진 중학생 아들에 대해 요즘 고민이 많다. 무작정 말리면 오히려 반항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고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저대로 가다간 문제가 심각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어떨때는 내가 낳은 자식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며 “이 같은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직장인 홍준호(37)씨는 얼마전 소빅F와 블래스터웜 바이러스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 컴퓨터가 장애를 일으키면서 큰 경험을 했다. 복구를 위해 컴퓨터를 시스템실에 맡겨둔 이틀 동안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것. 전화나 돌리고 다른 사람의 컴퓨터를 잠시 빌려쓰긴 했으나 내내 초조하고 뭔가 안정이 안돼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상당히 놀랬다”며 “인터넷이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제 전문가나 정책 입안자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인터넷이라는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야말로 일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로 인해 인간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부작용도 비례해 나타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인터넷으로 신용카드 사기를 쳤다는 보도는 일주일에 한두번은 들을 수 있는 뉴스에 속한다. 물론 이 같은 부작용을 모두 다 해결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나 부작용과 역기능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는 사회가 급속히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영향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반해 정치, 경제, 법과 제도, 문화 등 인간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부문은 일관된 방향이나 통합의 연결고리 하나없이 제각기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국내 사업자가 외국에 서버를 두고 제공하는 포르노 서비스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인터넷의 무국적성과 통제범위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단 이런 사회적인 측면뿐이 아니다. 우리가 강국이라고 자랑하는 인터넷 분야에서도 물리적 활용에서만 앞서나갈 뿐 기반 기술이나 원론적인 체계에서는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인 인터넷 주소체계에서는 민간기구인 ICANN이 전일적인 관리를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미국 상무성 산하의 기구로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모 인터넷 주소체계 전문가는 “이라크의 최상위 국가 도메인(ccTLD)인 iq가 이라크를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미국의 상무성 산하 ICANN에서 관리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라며 “최악의 시나리오로 국가간 심각한 분쟁이나 전쟁이 일어날 때 도메인 통제가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고 우려했다. 즉 미국 중심으로 이뤄지는 인터넷 주소체계가 바꿔지지 않는한 진정한 인터넷 강국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 기술과 인간사회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전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 연구로 칭하고 있다. 거버넌스는 통치, 지배, 관리를 의미하는 용어지만 인터넷 거버넌스는 일반적인 통제개념의 관리가 아니라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인터넷 공동체에서 탈집중화된 관리양식, 모든 사회영역이 참여하는 자율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은 이 같은 국가적인 과제를 두고 8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ICANN을 통해 전세계 인터넷 주소체계에 대한 전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사회적책임을위한컴퓨터전문가(CPRS), 전자프론티어파운데이션(EFF) 등 다수의 연구기관이 존재한다. 유럽 역시 글로벌인터넷프로젝트(GIP) 등의 기구를 두고 있으며 일본도 과학기술청 산하 과학기술정책연구소에서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안병엽 정보통신대학원 총장을 주축으로 인터넷을 기술, 인간, 사회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휴먼네트워크소사이어티(HNS)가 만들어져 활동이 주목된다.
국가 도메인 운영기관인 한국인터넷정보센터(KRNIC) 송관호 원장은 “그 동안 인터넷의 기술을 연구하는 곳과 사회문화적인 부분을 연구하는 곳 등 개별적인 움직임은 있었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참여하는 범국가적인 연구는 이뤄지지 못했다”며 “이제 우리 사회도 인터넷과 정보기술을 통해 보다 성숙해지고 제 2의 도약을 맞기 위해서는 기업, 개인, 시민단체, 연구기관, 정부가 함께 주체가 되는 인터넷 거버넌스 센터와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