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패러다임을 바꾸자](6/끝)편견을 버리자

 지난 8월11일, 철도청 인사는 공직사회에 조용하지만,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철도청 개청 이래 처음으로 기술직 출신이 감사담당관에 임명되는 등 직렬파괴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철도청은 이날 행정직이 독점해 왔던 홍보담당관과 기획본부 정보기획과장에 각각 기술직 출신을 기용하는 한편 기술직위인 망우신호제어사무소장과 시설장비사무소장엔 행정직을 전격 배치했다. 이공계 출신의 공직진출 확대가 공직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던져진 이후 이처럼 정부부처내에선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이같은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핵심 부서의 기술직 출신 기용이 늘리고 있는가하면 개방형 직위의 민간 전문가 임용률이 국민의 정부 시절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지는 추세다. 과기부, 정통부 등 일부 부처는 기술직도 갈 수 있는 복수직위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 1만달러 벽에서 8년째 허덕이고 있는 대한민국 공직사회는 여전히 건국이래 굳건히 유지돼온 ‘강행정직’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노 대통령까지 나서 이공계 공직 확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지만, 관료사회는 여전히 ‘저러다 말겠지’하며 관심 밖이다.

 피해의식에 젖은 기술직들은 ‘행정직들의 저항으로 괜히 기술직의 입지가 더 좁아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눈치다.

 이같은 현상은 공직사회 전반에 만연된 이공계에 대한 맹목적인 편견과 선입견이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직은 오로지 한 분야밖에 몰라’ ‘기술직은 사고가 좁고, 유연성이 부족해서 행정가로선 자질이 부족해’ 등 이공계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관료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린 상태다. 기술직 출신이 1급이나 차관 반열에 오르면 뉴스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공정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이런점에서 분명 그동안 이공계 출신 기술직에 대한 공직사회의 평가는 불공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행정가로서 자질을 평가하는 잣대가 이공계냐 인문사회계냐는 식의 출신 성분에 두어서는 안된다. 인문사회계 출신의 행정직들은 대개 ‘기술직들은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편견일 뿐이다. 같은 이공계 출신이라도 공대를 나와 행시를 패스한 공무원들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것은 분명 난센스다.

 황해웅 대덕연구단지 기관장협의회장은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했냐는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논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사농공상의 전통(?)을 이어받은 불합리한 공직구조가 이같은 편견을 고질화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중앙인사위원회 김명식 인사정보심의관은 “근본적으로 이공계를 전공자의 공직 진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이공계 전공자의 자질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공무원제도가 종적인 신분 등급을 나타내는 계급(1급∼9급)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불합리한 공직시스템은 결국 이공계 출신들이 공직에 입문,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서울대 이병기 교수는 “현재 관료사회 안팍에서 기술직에 대한 평은 상당히 편향돼 있다”며 “기술직에게 기획, 관리, 인사, 감사, 예산 등 요직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주지않은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김&장법률사무소 백만기변리사는 “현 공직시스템 아래선 기술직들은 보직관리를 거쳐 관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막혀있다. 이공계는 관리능력이 약하다고 하는데, 이는 보직관리를 통해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이공계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공계에 대한 편견의 원인을 공무원 교육제도와 과학기술과 사회와의 벽에서 찾는 사람도 적지않다. 과학기술기획평가원 최수현원장은 “사회적으로는 이공계와 비 이공계의 교류가 매우 어려운 현 교육제도와 과학기술문화의 미흡, 그리고 기술직 공무원에 대한 다양한 정책 및 조직관리 교육훈련 부족이 문제”라며 “지식정보사회에선 전공을 떠나 과학적 사고판단력을 갖춘 공무원들이 행정을 이끄는 ‘과학기술 구동형 국가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공계 스스로도 변해야 한다. 이공계에 대한 편견은 일정부분은 이공계들의 몫이란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로 ‘무늬만 이공계’인 사람을 공직으로 유인, 행정의 질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신여대 정택동교수는 “이공계 공직 진출의 길을 넓히면 자연계 학과에서 힘든 전문 지식을 쌓기보다 졸업장만 따 고시공부에만 매달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면서 “무늬만 자연계인 학생들의 진출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기술직 스스로도 행정력을 배양함으로써 사회의 편견을 해소하고 공직 전면에 포진할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기술고시 출신의 한 중앙부처 과장은 “이공계에 대한 편견과 행정직의 저항이란 벽을 넘기 위해선 무엇보다 기술직 스스로 실력으로 극복해야 한다. 임용전이나 임용후에 행정대학원을 거쳐 결코 행정직에 뒤지 않는 능력을 쌓는다면 기술직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토로했다.

 공직 진출을 꿈꾸는 이공계라면 아예 대학시절부터 행정가로서 필요한 사전 준비를 철저히해야한다는 지적도 많다. 설령 고시 과목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일반 정치,사회,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같은 이공계라도 연구원으로 갈 것인지, 공부를 더 할 것인지, 공직에 나갈 것인지에 따라 대학시절부터 기본적인 마인드가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전직 차관 출신의 최영환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은 “기술직은 경제, 경영, 행정, 법률 등 사회과학직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공직내에서 적지않은 벽을 느낀다”면서 공직입문전부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고등학교때부터 이과와 문과로 구분되는 이분법식 교육시스템을 개혁해야만 이공계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해소하고 행정직 중심의 현 공직패러다임의 전환은 물론 참여정부가 추구하는 ‘과학기술 중심사회’를 조기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박호군 과기부장관은 “불과 16∼17세에 인생의 진로가 결정되는 현 고등교육제도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