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가 최근 품목 선정을 완료하고 차세대 성장동력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품목과 주관부처 선정을 놓고 호된 진통을 겪어서인지 프로젝트의 취지가 벌써부터 빛이 바래졌다. 차세대 성장동력은 IT산업,특히 IT제조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이 참에 IT제조업을 몇단계 더 도약시켜 산업 기반을 다져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본지는 ‘제조업 업그레이드야 말로 차세대 동력’이라는 주제로 연말까지 매주 1회씩 기획 연재물을 게재하기로 한 것도 IT산업계의 이러한 요구를담아내기 위해서다. 무엇이 걸림돌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 지 업계 전문가와 독자와 함께 고민해 제시하려 한다.*
휴대폰 제조업체인 팬택의 이성규 사장은 올들어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일본 시장 진출 때문이 아니다. 고체촬상소자(CCD) 등 핵심 부품을 구하기 위해서다. 텔슨전자, 맥슨텔레콤 등의 CEO들도 마찬가지다. 카메라폰과 같은 고부가가치 휴대폰 수요가 급증하는데 부족한 부품을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 한남수 텔슨전자 사장은 “휴대폰업체들의 경쟁력 확보는 일본으로부터 핵심 부품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값싸게 조달하느냐에 달렸다”고 잘라말했다.
이게 휴대폰 강국을 건설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핵심 부품을 일본, 미국 등 선진국에서 죄다 들여다 쓴다. CDMA 칩의 경우 우리 기업들은 지난해 퀄컴에 3억2930만달러를 지급했다. 받은 금액의 34배에 이른다. 삼성전자가 미국 모토로라를 앞지르며 흥분하는 사이에 미국의 퀄컴과 TI는 삼성전자에 팔 칩수를 헤아리며 흐뭇해하고 있다.
한국, 중국, 대만으로 인해 경쟁력을 잃었던 일본의 휴대폰 산업도 CCD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참여정부는 ‘차세대 성장동력 발굴’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0년 뒤 한국을 먹여살릴 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국가 전략이다. 그 10대 품목에 4세대 휴대폰이 포함됐다. 그런데 이처럼 고급화 첨단화할수록 핵심 부품의 대외 의존도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표 참조
CCD만 해도 휴대폰에서 지능형 로봇까지 안들어가는 곳이 없으니 수입량은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다양한 원천기술의 중요성을 간과한 실수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분야가 임베디드 SW다. 핸드폰만해도 칩만을 얘기하는데, 금형과 카메라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부품 기술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계 톱 전자정보통신 기업들은 원천기술 특허를 통해 막대한 로열티 수익을 거둔다. DVD 플레이어에서는 소니·필립스·도시바가, 차세대 대형 디스플레이인 PDP는 일본의 후지쯔가, 동영상 멀티미디어 압축기술인 MPEG 2 분야는 소니 등이 원천 특허를 대거 장악했다. 원천기술을 갖고 있으면 엄청한 로열티 수입을 거둘 수 있으며 차세대 제품 개발과 표준화에서도 한결 유리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IT 대기업들이 휴대폰과 평면TV, DVD 플레이어 등 시스템에서 일본 업체를 젖히고도 ‘늘 쫓기듯 불안한 것은’ 이처럼 원천 기술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그랬듯이 가격 경쟁력으로 무장한 중국은 우리 턱밑까지 올라왔다.
사실상 가격 대비 품질 경쟁력만이 무기인 우리 (IT)기업들은 중국에 투자를 확대했으며 첨단기술의 ‘탈한국’과 ‘부메랑 효과’가 우려됐다. 국내 IT기업의 대중국 투자 규모는 전체 투자 규모의 25%를 웃돌고 있으며 해마다 증가 추세다.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은 “IT분야 같은 첨단산업조차 우리 기업들의 중국 투자가 가속화해 국내 산업의 공동화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외자유치도 중요하나 국내 IT 제조업체가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도록 정부가 경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목표는 선진국과의 뚜렷한 기술 격차와 높은 땅값 및 물류금융 비용 등으로 인해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다.
그래도 한줄기 희망의 빛은 있다.
우선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가 희망이다. 앞선 정보통신 인프라에 기반해 차세대 서비스를 선도할 수 있어 관련 제조업체의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가속화하는 선순환 구조가 어느나라보다 유리하다. 이 구조를 얼마나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 제 2의 CDMA 신화를 언제든지 재연할 수 있다.
또 다른 희망은 일부 디스플레이와 같은 ‘비(非)시스템 기술’의 성공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디스플레이산업이 그렇다. 디스플레이인 브라운관과 TFT LCD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오르자 그간 수입에 의존했던 디스플레이 관련 부품소재, 장비 산업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물론 액정 등 기초 물질을 전량 수입하고 있으며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에선 다소 약하다는 한계가 있으나 디스플레이산업처럼 원천기술에서부터 응용기술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발전한 국내 첨단 산업을 찾기 힘들다. 디스플레이 성공 신화를 다른 산업으로 확산시키면 차세대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은 더욱 쉬워진다.
하나의 과제가 대기업과 대부분 중소벤처인 협력기업의 역할 분담이다. 대기업들은 국내 중소 벤처기업들의 낮은 기술과 품질이 늘 불만스럽다.
중소벤처기업들도 대기업들이 원가 절감 차원에서 공급가만 깎으려들뿐 중장기적인 육성을 외면한다고 아우성이다. 대기업이야 1조원이 넘는 투자도 감행할 수 있으나 매출이 기껏해야 수백억원대인 중소 벤처기업의 투자는 한계가 있다. 인재도 잡아둘 수 없다.
전문 인력 부재는 대기업 역시 고민거리다.
우리나라는 그간 제조업을 통해 이만큼 성장했다. 특히 우리 경제의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는 IT산업도 그 뿌리를 제조업에 두고 있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발굴하기로 한 이상 제조업을 지금보다 몇단계 더 도약시킬 필요가 있다.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다.
본지가 ‘제조업 업그레이드야 말로 차세대 동력’이라는 주제로 연말까지 매주 1회씩 기획 연재물을 게재키로 한 것도 이러한 공감대가 하루 빨리 형성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무엇이 걸림돌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전문가들과 독자와 함께 고민해 제시할 것이다. 아직 기회는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인터뷰]유영환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국장
“어떤 품목을 선정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진국보다 어떻게 더 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겠습니다.”
정보통신부의 IT 신성장동력 프로젝트 실무를 지휘하는 유영환 정보통신정책국장은 “프로젝트에서 개발한 기술 기반만큼은 독점 없이 서로 공유할 계획”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간 진행된 국가 R&D 프로젝트는 대부분 정부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해 시작한 게 대부분이었다. CDMA와 같은 성공도 있었으나 현실과 맞지않아 애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게 적지 않다. 정작 개발의 주체인 민간기업들도 프로젝트 추진 전과정에서 사실상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유 국장은 실패 원인을 “국책 연구기관이 수요를 제기하고 비 전문가인 공무원이 관리했기 때문”이라며 “이번 신성장 동력 프로젝트매니저(PM)를 철저히 민간인으로 선정한 것은 앞으로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책 연구기관을 능가하는 기술 역량을 가진 민간기업이 먼저 수요를 제기하는 등 이제 전면에 나서야 한다”라면서 “무조건 정해진 프로젝트라고 그대로 가기보다는 끊임없이 오류를 수정하고 검증해 실효성을 높여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IT 신성장동력 프로젝트가 특정 대기업 위주로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유 국장은 “현 중소기업 지원체제를 고수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대기업 위주로 지원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유국장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에서 중소기업의 역량을 분야에 맞게 집중화해 더 큰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차세대 성장 동력 품목이 선정됐으나 정부부처간 영역 다툼 논란은 여전하다.
유 국장은 “경쟁 상대는 다른 부처가 아니라 선진국”이라면서 “미국과 일본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은 물론 중국이 바짝 쫓아온 상황이어서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국 기업의 R&D센터 유치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만약에 CDMA를 우리만이 독자 개발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겠습니까. 외국 R&D센터를 적극 유치하고 이들 기업의 기술 역량을 적극 활용하는 게 우리가 목표하는 IT산업 업그레이드를 달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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