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메모리 및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 생산규모는 제조기술력은 이미 세계정상에 우뚝 서있다. 하지만 이에 근간이 되는 제조장비나 소재산업은 그와는 정반대로 세계 5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메모리와 LCD 수출로 벌어들인 돈은 16조원 수준이다. 이들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LG필립스 두 기업이 설비투자에 쏟아 붓는 돈은 올해를 기준으로 60억달러 이상. 반도체장비와 LCD장비의 자급률이 각각 15%와 45% 수준임을 감안하면 이들 핵심장비의 수입금액은 연간 최소한 40억∼45억달러에 달한다. 이들 산업은 국가의 성장동력이자 무역역조의 주범인 셈이다.
연간 국내에서만 7조∼8조원의 시장이 형성돼 있는 관련 장비산업을 배제한 채 차세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사업의 육성을 부르짖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모든 IT분야의 핵심코어가 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은 정부와 산업계가 90년대 중반 인텔의 PC용 CPU ‘펜티엄’에 버금가는 기술을 개발하겠다며 국책연구를 시작했으나 개발의 어려움과 과도한 투자비, 그리고 시장의 급속한 변화로 중도하차한 상태다.
삼성전자 역시 자체적으로 캄리스크(CalmRISC)라는 자체 프로세서기술을 개발했으나 후속 기술 개발을 중단, 영국 ARM으로부터 라이선스한 반도체 설계자산(IP)을 활용해 제작한 모바일 CPU만을 내놓고 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PC 외에 디지털 컨버전스 기기와 시스템온칩(SoC) 등에서도 여전히 무시못할 핵심부품으로 손꼽히는 데다 차세대 디지털홈 및 이동통신 분야에서도 핵심이 되고 있어 기반기술 확보가 필수적이다.
때문에 산업계와 학계에서는 정부가 신성장 동력사업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반이 되는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개발을 다시 한번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90년대와는 달리 우리 산학계의 반도체 및 시스템 기술력이 대폭 업그레이드된 만큼 향후 1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차세대 전지와 관련해서는 전지극간의 격막 역할을 하는 세퍼레이터에 대한 국산화가 미흡해 일본의 토넨과 미국의 셀가드로부터 거의 전량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퍼레이터는 리튬이온 및 리튬이온폴리머 2차전지에 필수적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전지가격의 10%나 차지하는 핵심부품이어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모바일 기기의 성능이 다양해지고 초소형화되면서 차세대 반도체는 연성 동박적층원판(FCCL) 재질의 패키징 기판을 필요로 하지만 FCCL의 핵심 원자재인 아라미드 소재 부문에서 전량 듀폰 등 외산에 의존하고 있어 가격경쟁력 저하요인이 된다.
이밖에도 반도체 에칭 장비에 들어가는 캐소드·가스분산판(GDP) 등 소모품들은 전량 외산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소모품들은 고정밀도의 표면처리 기술이 요구되지만 국내 기술력은 외국의 60%에 수준에 불과해 대책이 요구된다.
<디지털산업부 반도체·부품팀>
◆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
일본 경제인들은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자조하듯 술회한다.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금융권이 부실채권 문제에 휩쓸리면서 지난해까지 ‘일본발 세계경제공황론’이 설득력있게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지난 10년 불황 내내 줄곧 흑자를 냈다. 일본의 저력은 금융 비즈니스가 아닌 ‘제조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조업을 이끄는 ‘투 톱’은 대형전자업체들과 전자부품업체들이다.
완성품을 주력으로 하는 소니·마쓰시타(파나소닉)·히타치·도시바·후지쯔 등 이른바 전자업체 ‘빅9’은 고부가 제품의 제조로 부활하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2(PS2)의 소니, PDP TV의 히타치, LCD TV·카메라폰의 샤프, DVD리코더의 마쓰시타, 태양전지의 산요 등은 차세대 전자제품에서 세계 시장을 앞서가고 있다.
이들 제품의 공통점은 일본이 가장 먼저 내놓았다는 점. PS2는 소니가 개발해 가정용 게임기 시장 판 자체를 흔들어버린 대박 제품이다. 또 PDP TV는 파이어니어가, LCD TV와 카메라폰은 샤프가 세계 최초의 개발업체이자 제조업체다.
그러나 진정한 저력은 화려한 완성품업체가 아니라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부품업체다.
교세라·TDK·닛토덴코·무라타제작소·로옴·니혼덴산 등 전자부품업체들은 각 분야별로 세계 시장을 호령한다.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용 자기헤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TDK를 비롯, 닛토덴코(LCD TV용 전자부품), 니혼덴산(HDD용 정밀모터), 무라타제작소(카메라폰용 전자부품, 아날로그기기용 콘덴서), 로옴(집적회로 관련부품) 등은 각 부품 분야별 ‘절대 왕좌’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는 평가다.
규모도 웬만한 완성품업체 부럽지 않다. 내년 3월 결산에서 매출 1조1400억엔(11조4000억원), 영업이익 920억엔을 전망하고 있는 교세라를 비롯, TDK(매출 6350억엔), 닛토덴코(4000억엔) 등 이들 6개 업체의 규모(내년 3월기 전망치)만 합쳐도 매출 3조2385억엔, 영업이익 3555억엔에 달한다. 여기다 일본 중소기업 중에는 소규모 부품 시장에서 세계 1위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업체가 셀 수 없이 많다.
최근 일본의 대표적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설에서 “도요타식 생산방식으로 일본 제조업이 부활하고 있다”고 단정했다. “세계 최고라고 자만하던 일본 제조업은 90년대 말부터 생산 현장의 생산성·수익성 향상에 주력, 더욱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금형산업 등 기반형 산업에서 최고 자리를 지켜야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일본 제조업체들은 금형 비용을 너무 낮게만 책정하려 하지 않아야 하며 금형업체들은 중국에게 기술 이전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배려성 충고도 덧붙였다.
<성호철기자 hcs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