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은 예스테크놀로지에 중요한 한 해 였다. LG전자로부터 CTI솔루션 제품에 대한 기술력과 품질을 인정받아 주문자개발생산, 이른바 ODM(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er)방식의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납품한 제품은 기업체·관공서·금융기관 등을 겨냥해 자체 개발한 음성 솔루션·팩스서버 등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했던가. 나는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삼성전자 종합연구소에서 근무한 이중무 현 CTO를 영입하는 등 개발인력을 보강했다. 이때 합류한 이중무 연구소장은 지금까지 예스테크놀로지의 기술 연구 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LG전자와의 공급계약은 예스테크놀로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이후 2년 간은 사업은 순조로웠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유통망 확보도 가능했다.
그러던 1997년, IMF사태를 맞아 예스테크놀로지도 위기를 맞았다. 모든 것이 축소, 후퇴로 요약되던 시기였다.
인텔로부터 음성보드를 수입하던 예스테크놀로지도 엄청난 환차손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가족규모의 회사가 환차손으로 고스란히 1억을 잃고 만 당시의 상황은 사업의욕을 송두리째 뽑아놓기에 충분했다.
IMF는 자금을 빼앗아 갔지만 오히려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모든 기업들이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시도하면서 사람을 대신해 CTI 솔루션으로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IMF를 기회로 CTI시장에 대한 본격적인 수요도 일 것이라는 판단하에 CTI솔루션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다른 회사들은 환차손에 의해 적자로 돌아선 프로젝트를 계약 파기할 때, 당장의 손실은 뒤로하고 고객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예스테크놀로지의 이름과 기술을 고객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하지만 어려울 때 주고받은 도움은 평생을 함께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이는 현실로 나타났다. 개발자들은 업체들로부터 밀려드는 개발 요청 사항을 밤을 새워 가면서 적기에 시스템을 개발·구축했으며 영업을 담당한 나는 밤낮으로 수주 활동을 벌였다. 소파 겸 침대를 놓고 직원 15명이 합숙하다시피 하다보니 제품납품시 밤을 지새운 엔지니어는 달리는 차안에서 자고 운전은 항상 사장 몫이었다.
매출은 다시 늘기 시작했고 고급 인력도 추가로 확보해 사업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특히 1999년은 많은 투자회사들이 투자할 회사를 찾아 제안을 활발히 전개했다. IMF 시기에 성장하는 예스테크놀로지에 여러 기관으로부터 투자를 하고 싶다는 제안도 들어왔다. 투자 유치 결정을 하는 그 때는 예스테크놀로지도 행복한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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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우리는 밀려드는 주문으로 직원들은 좁은 제품개발실을 떠날 수가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