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융합기술` 전쟁](10/끝)지금 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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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계 과학계가 다양한 기술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시스템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융합기술(fusion technology)’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외에서 개최되는 각종 학회와 전시회, 심포지엄의 주제는 모두 정보기술(IT)과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의 융합과 발전 방향이다. 이런 현상은 융합기술 개발의 열기를 그대로 반증한다.

 전자신문사는 지난 4개월간 미국과 유럽의 연구소와 대학, 기업 탐방을 통해 융합기술 개발을 앞당기고 있는 선진 시스템을 살펴봤다. 이들 선진 산학연 연구소의 공통점은 △폐쇄적인 연구 시스템 타파 △창의적인 아이디어 창출 환경 조성 △새로운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기초과학을 중심으로 한 인재양성 △산업으로의 육성 등으로 압축된다. 이런 전쟁속에서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는 데 밑바탕이 될 육성방법을 국내 전문가에게 들어봤다.

 ◇엄융의(서울대 의대 교수)=융합기술은 IT, BT, NT 전문가들이 동일한 프로젝트에서 공동 연구를 한다고 해서 소정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효율적인 융합기술연구가 행해지려면 다른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융합과학 기술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피지옴(Physiome)연구를 예로 들면 IT교육을 학부에서 받은 사람이 대학원 과정 중에 생물학, 생리학, 약리학 등을 전공하는 시스템이 적합하다. 또 대학에 기존 전공 과목 외에 융합기술을 담당하는 교과과정의 신설이 필요하고 동시에 융합기술학과나 전공분야의 신설이 필요하다.

 정부의 지원책도 한 부분이다. 정부는 우선 어떤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경쟁력이 있는가를 모색한 다음 장기적이고 통합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기존의 프론티어 프로젝트처럼 백화점식 나열형 공동연구가 아니고 한 목표를 향한 집약적이고 통합적인 연구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소수 정예에 집중 투자하는 것은 물론 연구책임자의 독재에 가까운 방향설정, 연구추진 체계가 요구된다. 산업계의 관심도 융합기술을 육성하기 위한 밑바탕이다. 우리는 그 동안 외국에서 어떤 분야가 큰 인기를 모은다고 알려지기 전에는 연구를 착수하지 않았다. 외국에서 잘 나가는 분야라는 소문이 난 뒤에 뒤쫓아 가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남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벤처 정신으로 지원해야 한다. 융합기술의 최종 사용자는 산업체다. 산업계에서 좀 더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갖고 융합기술에 대해 지원을 해야 한다.

 ◇장준근(디지탈바이오테크놀로지 사장)=융합기술의 경쟁력은 기초과학 인력의 질에 달려있다. 현대 정보와 사회에서 융합기술은 경제성과 효율성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모든 산업 주체들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필수 핵심 역량이다. 다양한 기술 분야의 융합을 통한 상승효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을 가져온다. 이를 통한 생산성 향상은 곧 기업의 경쟁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에 뒤진다는 것은 곧바로 기업의 경쟁력이 저하되었음을 단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후발개도국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기술 개발의 경향을 따라잡고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조기에 달성하기 위한 실마리를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러한 전환점을 단순히 학제간 공동연구를 지향하는 연구과제에 국가 지원의 우선 순위를 두고, 몇몇 대학에 이름도 아리송한 새로운 학과를 만드는 것만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융합기술을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새로운 전공의 인력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급한 것은 융합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기본을 더욱 탄탄히 하는 것이다. 융합기술은 단순히 서로 다른 전공의 과학자가 함께 연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적인 융합 기술은 탄탄한 기초과학과 다양성을 확보한 부품소재 기술을 토대로 성숙할 수 있는 것이다. 기초과학과 부품소재 기술의 탄탄한 지원 없이 확보된 융합기술은 그야말로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며, 그러한 기술이 국제경쟁력을 갖고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불고있는 융합기술 개발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일은 기초과학 육성을 통한 과학기술의 기초 체력 향상이다. 물리, 화학, 수학과 같은 기초과학의 탄탄한 바탕 위에 다양한 부품, 소재기술이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융합기술은 말뿐인 공허한 상상이다.

 융합기술은 디지털혁명 시대의 새로운 기술 트렌드가 아니라 탄탄한 기초 과학기술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도되는 과학기술의 발전 형태다. 융합기술의 성과물은 혁신적인 생산성을 제공하지만 융합기술 자체는 혁신적인 변화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과학기술의 진화단계라고 봐야 한다.

 ◇노경태(분자설계연구소 소장)=현재 산업 성장의 세계적인 추세를 보면 이미 형성된 산업분야간의 경계에서 높은 부가가치를 갖는 융합기술들이 탄생하고 있으며 이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산업분야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및 산업분야의 출현은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각 산업분야에서 장기간에 축적된 기술과 21세기 들어 급속히 바뀌고 있는 인류의 삶의 패러다임에 기인한다. 최근 융합기술의 새로운 분야가 쉴새 없이 도출되고 소개되고 있다. 심지어는 국내에 단 한 명의 전문가도 없는 분야도 계속 소개되고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야도 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속에서 우리나라가 취해야할 정책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융합기술의 특성을 살펴보면 첨단기술 보유국의 활성화된 산업을 기반으로 융합분야가 탄생한다. 또 최고의 기술보유 국가나 회사들만이 상업적으로 성공한다. 기술의 변화가 매우 빠르고 기술의 분야와 방향은 주로 산업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융합될 각 분야에 이미 많은 기술력과 인력이 축적돼 있어야 성공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융합기술의 육성은 세계 산업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 방향과 속도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력과 인력의 분석을 바탕으로 정교한 기획하에 이뤄져야 한다. 융합분야에서 최근 정부의 기획은 분야의 도출이나 실행시점 및 기간에 있어서 너무 현실성이 없다. 융합기술은 산업에서 더욱 나아가 상품과 직접 연계되므로 매우 목적지향적으로 기획되고 시장조사에 바탕을 둬야한다. 실제 새로운 융합기술을 도출해낼 수 있는 인력의 양성 및 확보가 필요하다. 최근 국내 융합기술의 기획은 현존하는 산업이나 기술 인력들의 연구비 확보를 위한 포장에 불과하며 이는 오히려 융합기술의 발전을 저해할 뿐이다.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을 담당할 인력의 확보 또한 중요하며, 기존 교육체계로는 급속히 변하는 환경을 대처하기에는 힘든 형편이므로 유연하고 다양한 형태의 교육 시스템 지원이 필수적이다.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전문인으로서의 양심일 것이다. 새로운 분야라는 것을 내세워 정부의 지원을 받기 전에 내가 또는 우리가 가진 기술 및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바탕을 둔 기술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학 기술자들은 이 시점에서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확한 기술 분석에 바탕을 둔 미래에 대한 비전과 신념 없이는 21세기의 기술 경쟁 시대에서 국제적인 경쟁력 확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에필로그

 융합기술(fusion technology)은 2000년초 불었던 닷컴 열풍에 비유되면서 전세계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연구 욕구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IT와 BT, NT가 각각 세상을 변화시켰던 20세기를 넘어 여러 분야의 연구 내용을 접목한 ‘융합기술’이 21세기를 대표하는 기술 키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취재를 떠나기 전 융합기술도 60년대 유전공학, 80년대 정보기술과 같이 세계 과학계에 가끔 스쳐가는 바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저 관련 분야 연구비를 늘리려는 우리의 현실과 달리 미국과 유럽의 대학과 연구소, 기업에서는 새로운 산업 혁명을 가져올 융합기술의 개발은 물론 산업으로의 육성을 위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변화하는 시대와 기술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에 따르는 인력 양성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산업의 틀을 형성하면서 세계 시장을 주도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미국=미국 최고의 상아탑이라 일컬어지는 스탠퍼드·UC버클리·MIT, 항공우주정복의 꿈을 실현하는 나사(NASA), 애질런트테크놀로지스 등 산학연 연구 현장에서 ‘융합기술’이 가져올 새로운 변화에 대비하는 것은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스탠퍼드와 UC버클리, MIT에서는 학교 내에서 전공의 벽을 허무는 것은 물론 다른 대학과 연계해 다양성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각 대학은 이 시스템 도입으로 단기 경쟁력을 상실하더라도 장기적인 혁신 역량을 키우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애질런트테크놀로지스는 융합기술을 새로운 기술의 트렌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정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단계로 인식하고 있다. 애질런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언제 어디서나 실현할 수 있는 연구 인프라를 구축, 융합기술 개발을 기업의 경쟁력 향상의 핵심 요소로 육성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새로운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융합기술의 산업화를 실현하고 있다.

 ◇유럽=과학기술 선진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독일과 영국. 독일 마인즈에 위치한 막스플랑크폴리머연구소는 인근 마인즈대학과 화학과를 통합해 좀더 자유로운 연구 인프라를 갖추고 실습 위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독일의 한 지방대학인 엔란겐·뉘른베르크대학은 화학과 컴퓨터를 접목시킨 과감한 커리큘럼 도입으로 세계적인 화학정보학(Cheminfomatics)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화학과에서 시작한 이 대학의 개혁은 화학에 컴퓨터, 생물을 접목해 융합기술 핵심 인력 양성소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는 융합기술이란 말이 없던 시절부터 과학기술간 경계를 만들지 않고 자유로운 협력 체제를 적극 장려해 세계적인 명문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옥스퍼드는 의학과 수학, 공학의 결혼을 21세기 과학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과학으로의 이동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융합기술의 선봉에 서려는 영국 정부의 의지에 부합해 런던대와 임페리얼대는 런던 한가운데에 나노센터를 설립하고 아카데미 차원의 연구를 넘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반도체 팹을 구축한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인 ST마이크로는 차세대 핵심 전략 기술로 반도체 기술과 바이오 기술의 융합을 꾀하고 있다. 이 회사는 향후 10년을 대비해 실리콘 이후의 회사를 이끌 원동력을 융합기술에서 찾고 있다. ST는 인체 내 질병을 진단하고 일부 치료까지 가능한 인공지능의 바이오 센서와 랩온어칩, 유체공학칩 등을 잇따라 개발해 바이오 일렉트로닉스의 새 장을 연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