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기업은 어떡하라고

 요즘 정치권은 삶은 무에 이 안 들어갈 이야기로 서로 네탓네탓, 진흙탕싸움이 한창이다. 가마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고 나무라는 희대의 입씨름을 보면 한심함을 넘어 차라리 서글픔마저 느낀다. 북한 핵문제에 이라크파병 논의까지 국론이 백가쟁명식으로 갈라지고 찢어져 혼란스러운 풍경이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다.

 더구나 모 그룹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면서 불거진 비자금 문제로 분위기는 숫제 난장을 연상케 한다. 정치인들이 기업의 돈을 받아 정치하는 것은 시비의 대상이 아니지만 문제는 투명성에 있다. 합법적으로 돈을 받아 선거 자금으로 사용했다면 누가 비아냥거릴 것인가. 고 정몽헌 현대 그룹회장이 속내를 밝히지 못할 돈 문제로 고민하다가 투신한 사건이 뇌리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이번엔 SK그룹이 비자금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대선 자금이 정치권에 태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되자 노 대통령은 “대선 자금 전모를 수사해야 하며 경제인들도 고통스럽겠지만 협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물론 ‘보험성 자금’을 준 기업은 사면할 용의가 있다는 전제를 깔았지만 기업들이 받아야할 괴로움은 짐작이 간다. 노 대통령이 암유적으로 표현한 ‘보험성 자금’이라는 말은 기업인들의 심각한 자기검색증후군의 단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힘들게 수출해 번 돈을 생명보험회사도 아닌 정치권에 보험 든 셈치고 거액을 내놓는 이 야릇한 거래가 외국 투자자의 눈엔 어떻게 비춰질까.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이 내는 소위 ‘보험료’는 여러 항목이 있다. 우선 5년 만기의 ‘대선보험’, 4년짜리 ‘총선보험’을 포함한 정치후원보험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불우이웃돕기 같은 이 모금 활동에 불참하거나 보험료를 적게 내면 소위 납부 태도 불량으로 간주돼 유무형의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과거에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암보험 따위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회사를 안 망하게 해준다는 보장성 보험이 있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어깨들처럼 상인(기업)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받은 자릿세로 조직을 먹여 살리는 것과 뭐 다를까. 군사독재정권 실세들에게 불려가 엄청난 금액을 기부 명목으로 탈취 당했던 경험이 있는 기업들로서는 괘씸죄에 걸리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업활동의 목표가 이윤 창출에 있지만 그것 못지 않게 기업 나름의 윤리의식이 있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정치 논리에 경제논리가 좌지우지되는 풍토에서 기업 일방에게만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요구를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경제가 일어나야 나라가 산다. IMF 이후 기업의 경영 내용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고, 외국 투자자들이 제 손금 들여다보듯 재무구조를 꿰고 있는 상황에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권과 결탁하는 구태는 기업의 신인도를 하락시키는 그런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가 극심한 무력증에 빠져 앞날이 불투명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높이고 있다.

 소비가 위축되어 내수는 부진해 기업들이 시설 투자를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게 우리 산업계의 실정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10년 후에 먹고 살 신성장동력 아이템을 내놓고 기업들을 독려하고 있다. 정치가 자꾸 경제의 발목을 딴죽거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인들이 강요한 보험에 들었다가 엉뚱한 불똥에 덴 기업인들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죄는 막동이가 짓고 벼락은 샌님이 맞은 꼴이라고.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