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동네 사람들]살아남은 3류들에게 갈채를

얼마 전 길거리에서 아는 얼굴 하나를 만났다. 그 얼굴은 몇 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기도 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앙금으로 남아있는 보기 미안한 얼굴이기도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때는 2000년 초였다. 전문대를 졸업한 후 용산 근처 작은 사무실에서 컴퓨터 부품 판매와 조립을 시작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는 SI 사업을 병행하면서 휴대폰 부품과 관련된 신규 사업을 기획하였고, 설비 투자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서 나를 찾았다. 그의 아이템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회사에서 직원들을 상대로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데 결과는 아주 좋지 않았다.

번듯한 일류 대학이 아닌 지방의 이름조차 낯선 전문대를 졸업한 그의 학력과, 전문대를 졸업한 이후에 그가 진행했던 사업 아이템들의 수준으로 보아 도저히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게다가 직원이라고 해봐야 고작 20명 내외였고 수준도 낮다는 것이 덧붙여진 결격 사유였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에게 ‘사장님과 직원들의 학력’이 결격 사유라고 말할 수 없어서 다른 이유를 둘러댔었다. 그의 사업에 대한 열정과 솔직하고 깨끗한 품성을 알고 있었기에 자금을 지원하지 못해 안쓰러웠었다.

몇 년 뒤에 만난 그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그에게 사업 현황을 들었다. 초기 설비 자금이 없어 고생을 많이 했었지만, 2001년 말부터 다행히 휴대폰 관련 사업이 궤도에 올라 2002년도에는 매출 130억원을 달성했고, 올해는 200억원 내외의 매출액에 14억 정도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년도 코스닥 등록을 하기 위해 주간사를 선정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놓친 고기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학력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한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 밀려왔다.

그를 만난 이후, 몇 건의 투자를 검토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업들이 제시한 사업계획서를 읽다가, 대표이사나 중요 임원들의 최종 학력이 예전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발견한 것이다. 벤처 열기가 한창이었던 1999년만 해도, 대표이사나 임원들은 서울대나 KAIST의 정보통신 관련 전공자가 기본이었고, 외국의 유명 MBA나 박사 학위를 가졌거나 대기업 연구소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대표이사들은 서울 소재 평범한 대학교 출신이었고 외국학위 소지자도 아닌 분들이었다. 그 대신 운영하는 회사의 업력이 10년 이상인 점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2003년도 하반기에 코스닥에 등록했거나 예비 심사를 통과한 기업 중에서 무작위로 10개 기업을 추려서 대표이사와 중요 임원들의 최종 학력과 학교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명문대 출신 대표이사가 채 50%를 넘지 못했다. 명문대 출신들이 경영하는 기업은 바이오나 전문 광학 등 극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기업이었다.

명문대 출신 중에서도 전자공학과 같은 이공계 출신이 아닌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 대표이사인 경우도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수도권 지역의 공업계 고등학교와 같은 지역의 공대를 나오신 분도 있다는 것이다.

2000년 초까지 코스닥에 등록한 기업의 대표이사 대부분은 서울대나 카이스트, 연세대 등 명문대 출신이 많았다. 지금도 코스닥에서 대장주로 꼽히는 기업의 대표이사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이다. 또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스타 CEO 대부분이 명문대의 정보통신 전문학과 출신이다. 그러나 지금 코스닥을 향해서 무섭게 성장하거나 입성을 눈앞에 둔 기업의 대표이사 중에는 우리가 3류라고 부르는 대학 출신들이거나 정보통신 비전공자가 상당수다.

이 분들은 어떻게 어려운 사업환경 속에서 학력 차별과 전공 차별이라는 짐까지 안은 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어오고 있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분들은 관광객들의 찬사와 사진 세례를 받으며 제철 한철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가 바람 불면 뚝뚝 떨어져버리는 목련이나 동백이라기보다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야산에서 사시사철 바람맞으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잡초와 같다. 사시사철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끝끝내 살아 남는 끈질긴 생명력이 이 분들의 힘이다. 화려한 기술보다는 한 푼이라도 더 팔겠다고 매달리는 영업력이 이 분들의 자산이다.

정보통신 관련 산업이 본격적으로 떠오른 1995년 중반 무렵, 국내 벤처 산업의 주요 아이템은 미국의 실리콘밸리 따라잡기였다. 벤처 비즈니스를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정보통신 산업 흐름을 볼 수 있는 눈과, 그 흐름에 적합한 사업을 개발하는 능력이었다. 따라서 명문대 출신의 연구원이나 외국 학위 소지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벤처캐피탈에서도 투자를 결정할 때 대표이사의 과거 경력과 학력을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네트워크와 새로운 흐름을 읽는 눈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대표이사나 직원들 중에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을 각 1억원의 가치로 평가해서 총 투자 금액을 결정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봄, 주식 시장이 붕괴하고 벤처 붐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재편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트랜드를 발견해서 사업화하는 것이 주임무가 아니라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투자시장이 얼어붙고, 대형 벤더인 통신회사들의 구매가 대폭 축소된 상태에서 모든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50억 또는 100억원을 투자받은 업체들도 불황을 이기지 못해 부도가 나거나 사업을 철수할 때, 그 좋은 시절 한 푼도 받지 못한 업체들 중의 상당수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좋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연줄도 없고, 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기업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내핍을 함으로써 몸을 가볍게 만들고, 끊임없이 시장의 상황에 자신을 변화시키고, 시장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사회에서 말하는 일류들 중에는 ‘온실 속의 화초’들이 많다. 특히 평준화 이후 세대 중에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적극적인 뒷받침을 받으며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오거나, 누구나 선호하는 안정적인 직장에 쉽게 진입한 후에 벤처 붐에 편승해서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외국어 능력과 전문적인 학술 능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흐름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론화하여 시장에서 포장하는 기술은 세련됐다. 그러나 잡초들이 가진 끈질긴 생명력이나 영업 능력,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너무나 평탄한 길을 걸어왔기에 비 오고 바람 부는, 때론 혹한과 혹서가 몰아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기 스스로의 몸집을 줄이는 내핍 생활을 못견뎌 한다.

벤처비즈니스는 창업 아이템 경진 대회와는 다르다. 문서화 된 사업 아이템 경연장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시장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시장에서의 검증은 숫자와, 파란색과 빨강색이라는 색깔로 이루어진다.

올해 코스닥 등록이나 거래소 등록 심사는 굉장히 엄격했다.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떤 우량한 회사는 미래의 매출액이나 순익에 의문이 있다는 이유로 재심, 삼심을 거쳐서 등록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어려운 심사를 거쳐 통과한 회사의 사업 아이템을 보면 화려한 아이템이 없다. 오히려 낡은 아이템이라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사업을 해서 성공한 예가 많다. 이런 기업의 공통점이 있다. 매출액과 순이익이 많이 났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 벤처 붐이 꺼지고 정부의 정책이 우왕좌왕하는 혼돈의 시기를, 자본의 외면으로 자금이 말라붙은 어려운 시절을 꿋꿋이 견디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기업 환경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한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벤처 정책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말들이 나오지만 실제 시장에서 두 손을 들어 환영할 만한 정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벤처기업의 수는 20% 이상 급감했다. 이 곳 저 곳에서 부도나는 소리도 들려온다. 벤처에 뛰어 들었던 똑똑한 사람들은 사업을 접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떠나고 있다. 시장에 남아서 사업을 계속 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보이는 시대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핏대 세우면서 내뱉은 대사가 생각난다. “강한 놈이 살아 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강한기야 !!”그렇다. 일류들이 모여서 만든 회사가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선도할 핵심 아이템을 가진 회사가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시장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일류다. 시장에 뿌리 내리고 그 속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이다.

태생적 멍에를 짊어지고 시장이라는 혹독한 들판에서 꿋꿋하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잡초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 조명환은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과 영화를 따로 공부함. 요즈음에는 미술사에 푹 빠져 열심히 그림 보러 다니고 있음. 광고대행사 AE로 밥벌이를 시작했고, 조선일보, 디지틀조선일보, 한겨레신문사를 거쳐 1999년부터 벤처캐피탈에 몸담고 있음. 현재 C&L벤처투자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음.

◆ 조명환의 "벤처 동네 사람들"

벤처 동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야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신화같은 이야기부터 대폿집 안주거리 같은 가십거리도 있다. 다른 동네 사는 사람들에게 벤처 동네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기도 하며, 꿈의 엘도라도이자 핏발 선 눈으로 가득 찬 투전판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다른 동네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담담하게, 때로는 핏대 세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