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스페니쉬 아파트먼트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인문주의자지만, 유럽 대학생 사이에는 오히려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각 나라 대학의 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1987년 유럽연합에서 만들어 시행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에는, 11개국 3000여명의 대학생들이 등록돼 있고, 유럽연합의 가장 성공적 결과물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은 단일화폐 유로를 비롯해 점점 국가간 장벽이 허물어지고 하나로 통합돼 가고 있는데,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야말로 미래의 단일 유럽을 위해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 나가는 중요한 토대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스페인에 가보지 못했다면, 특히 바로셀로나를 1992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된 도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를 꼭 봐야 한다. 1883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아직도 짓고 있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대표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등장하고 구엘 공원의 그 화려한 벤치는 주인공들이 짙은 애무를 나누는 장소로 사용된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영화 제목이지만 널리 쓰이고 있는 하나의 속어이기도 하다. 특히 스페인과 인접해 있는 프랑스에서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라는 단어는 여러 문화가 뒤섞여 있고 모든 법칙들은 무시되며,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정열적인 스페인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의 당혹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단어인 셈이다.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원래 의미대로 스페인의 한 아파트에서 국적이 다른 학생 7명이 1년간 거주하며 벌이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영국에 있는 남자친구 몰래 바로셀로나에서 만난 미국인과 섹스를 즐기는 ‘웬디’, 웬디의 남동생이자 쉴새없이 지껄이는 수다쟁이 ‘윌리엄’, 이탈리아에서 온 지저분한 ‘알렉산드로’, 깔끔을 떠는 독일인 ‘토비아스’, 덴마크에서 온 ‘라스’, 레즈비언 ‘이사벨’, 그리고 ‘자비에’가 이야기를 이끈다.

 영화는 왁자지껄 생기발랄하다. 다양한 문화적 충돌에서 오는 낯선 경험들이 드러나 있고, 또 서로 간의 갈등이나 우정 등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끝까지 영화적 재미를 유지하고 있다. 자비에의 프랑스 애인으로 마틴느가 등장하고, 바로셀로나에서 만난 프랑스인 유부녀 안네소피와 삼각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쿨하다.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이 십년전 바로셀로나에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으로 공부하고 있는 여동생을 방문해 일주일간 겪었다는 자전적 경험은 영화 속에 훌륭하게 녹아 있다. 그 중 백미는 웬디가 아파트에서 미국인 남자와 뒹굴고 있는 동안 진짜 남자 친구가 방문하자 다른 거주자들이 수습해 주는 과정이다.

 결국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하나로 가까워져 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에라스무스같은 다국적 프로그램들이 더 많이 출현할 것이고, 다양한 문화적 충돌이 발생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그러나 다양한 문화적 충돌이 혼재돼 있는 상황 자체만 노출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인생의 한 시기에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사랑과 갈등, 타인과의 관계 등이 힘있게 묘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