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사는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중견업체다. 지난 90년대 말 A사가 만든 제품은 공급이 달릴 정도로 국내외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러자 동남아 소재 기업들이 유사품을 만들어 절반가격에 속속 내놓았다. 이에 당황한 A사는 중국 공장이전을 결정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사 수준에 맞도록 가격인하를 해야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결정은 막대한 후회로 돌아왔다. 중국생산이 기대만큼의 가격인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품질이 크게 떨어져 고객 이탈의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A사와 마찬가지로 날로 심화되는 국제 경쟁을 가격인하로 뚫고 나가겠다고 결심한 대부분의 업체들은 뼈저린 아픔을 겪는 빈도가 늘고 있다. 글로벌 경쟁체제가 가속화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가격경쟁력으로 승부를 거는데에는 어디까지나 한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남양호 수석연구원은 “선진기업의 경우 진정한 경쟁력은 연구개발(R&D)에서 나온다는 것이 보편화된 사실”이라며 “심지어 가격경쟁력도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을 통한 인건비 절감이 아닌 R&D를 통해 달성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R&D는 미래성장엔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진리다. 기업의 미래나 국가 경쟁력은 기술력에 달려 있다는 것은 산업혁명 때나 정보기술혁명을 겪고 있는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오히려 21세기 무한경쟁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일본기업들이 10년이 넘는 장기 불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꾸준한 R&D 투자로 인한 기술경쟁력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지금 우리기업들이 중국의 기술 추격에 떨고 있는 것도 장기적인 시각에서의 R&D 투자가 미진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나라가 세계의 허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성장엔진 발굴 및 육성이 중요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미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R&D가 빛을 발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무엇이 있을까. 무엇보다 R&D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90년대에 들어서서 기업의 전략적이고 전폭적인 R&D 없이 결과물을 수확한 경우는 없다. 또 선택과 집중 필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막연히 기업 매출의 일정분을 R&D에 투자하는 것 또는 기업 전체 인력의 어느정도를 R&D에 투입하는 것이 아닌 동종업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그룹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남들과 경쟁해서 1등을 하든지(NO.1), 남들이 안하는 것을 갖고 1등을 하든지(Only 1)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서 1등이 아니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뼈 있는 말이다. 결국 기업에서는 경쟁력있는 분야, 해서 이길 수 있는 분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업규모가 작을수록 당연히 절대 투자규모가 부족하므로 R&D의 초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R&D 속성상 극한 상황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획기적인 성과가 창출될 확률이 높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기업과도 과감하게 손을 잡을 수 있는 개방적 R&D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부족한 기술 및 자원을 서로간 공유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다는 취지로 소위 도움만 얻을 수 있다면 경쟁사와도 뭉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미 해외에서는 보편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단적으로 지난해 세계 반도체업계의 합종연횡 바람은 놀라울 정도였다.
독일의 인피니온은 중국 SMIC, 대만 윈본드 및 난야 등과 협력을 했으며 이를 통해 D램시장 세계 3위로 올라섰다. 마이크론도 300㎜ 웨이퍼 가공시설 투자 재원 마련을 위해 지난 9월 인텔과 손잡고 4억5000만달러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이밖에 메모리카드 업체인 미국의 샌디스크는 일본 도시바와 협력하기로 했으며 NEC·도시바 등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공동출자해 설립한 ASPLA는 영국의 ARM사와 손을 잡았으며 또 도시바·NEC·르네사스 등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2007년 65나노미터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앞으로 관련 기술을 공동 개발해 공유하기로 최근 합의했다.
R&D의 결과물을 유관부문과의 연계도 우리기업들의 최대 취약점 가운데 하나다. 성공적인 R&D는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양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R&D 부문은 영업부문과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수요자의 니즈를 파악하고 시장의 흐름에 부합되는 제품 개발에 나서야 한다. 생산부문과도 공조를 통해 제품이 안정적으로 생산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며, 생산부문은 양산상의 문제를 조기에 피드백해야 할 것이다.
정부도 산업계의 R&D 투자에 대한 관심을 멈춰서는 안된다. 과학기술투자를 늘리고 국가혁신시스템을 개혁해 민간기업의 R&D 위축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최근 한국산업기술평가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정부의 R&D 예산 규모가 미국의 26분의 1, 일본의 6분의 1 등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형 R&D 국책과제를 수시로 발굴·추진해 민간 R&D 활동을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참여정부들어 ‘차세대 10대 성장동력’이라는 대형 로드맵을 그리며 이러한 토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 성장동력이 단순히 기술개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산업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와 민간의 R&D 투자는 국내총생산의 2.96%로 세계 7위 수준이지만 기술협력과 특허활용도는 각각 33위와 21위로 낮게 나타났다. 결국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그것의 결과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정부는 국가 과학기술투자의 유지로 두뇌의 해외유출을 막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한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고급인력 해외유출 지수가 4.6으로 조사대상 50개국 가운데 40위로 나타났다.
임일섭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한국은 90년대 초반만 해도 두뇌유출지수가 7을 넘어서는 등 비교적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매우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우리 경제가 고급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면 성장잠재력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kr>
◆ 인텔·IBM 등 다국적 IT기업 `한국R&D센터` 계획 속속 발표
글로벌 IT기업들이 차세대 핵심기술 개발지로 한국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IT부문의 고급 인력 및 인프라 그리고 뛰어난 기술을 활용하겠다는 취지다.
현재 국내에 R&D센터를 설립키로 확정한 대표적인 IT기업으로는 인텔과 IBM을 꼽을 수 있다. 작년 8월말 한국에 R&D센터를 세우겠다는 공식입장을 밝힌 인텔은 무선(Wi-Fi), 디지털 홈, 주파수 활용방안, 콘슈머 중앙처리장치(CPU), 소비자가전 분야에 집중할 계획이다. 인텔은 초기 20여명의 R&D인력에서 시작한 후, 계속 늘려나갈 예정이다. 인텔은 말레이시아, 대만 등 세계 각국에 여러 R&D센터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지만 최첨단 분야의 R&D센터를 두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인텔에 이어 IBM도 정보통신부와 공동으로 서울 도곡동에 800평 규모의 ‘IBM 유비쿼터스(Ubiquitous) 컴퓨팅 연구소’를 개설한다. 이 연구소는 개설과 동시에 4년 동안 3200만달러를 투자해 텔레매틱스와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분야 기술을 개발한다. 투자비는 정통부 산하 정보통신연구진흥원(IITA)과 IBM이 각각 1600만달러씩 분담. 연구인력은 IBM 본사 연구소인 웟슨연구소의 핵심연구원 10명과 한국 IBM 기술연구소 연구원 25명, 신규 채용인력 등 70여명으로 충당되며 향후 1백명으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또 세계 2위의 중앙처리장치(CPU)업체인 AMD는 자회사인 FASL을 통해 R&D센터를 설립할 계획이다. AMD가 설립하게 될 센터는 휴대폰에 사용되는 노어형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고 또 우리나라 주요 휴대폰 제조업체의 신제품 개발을 지원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계측기업체인 미 애질런트테크롤러지스도 국내에 무선통신 R&D센터를 설립한다. 애질런트는 무선통신시장이 앞서있는 한국에서 자사가 보유한 각종 기술과 애플리케이션을 시장에 맞도록 최적화할 예정으로 연구인력은 100명 내외로 시작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HP, SAS, 사이베이스(Sybase) 등 세계적인 IT기업들이 국내 R&D센터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글로벌 IT기업들의 국내 R&D 투자결정은 동북아 IT허브를 추진하고 있는 우리 정부의 정책에 큰 탄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 외국기업이 우리나라에서 R&D를 하는 분야가 디지털홈, 무선기술, 텔레매틱스, 임베디드SW 등 미래 유비쿼터스 환경 구축에 필요한 원천기술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IT신성장동력에 꼽히는 유망산업 분야다. 이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의 R&D센터는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차세대 신성장동력 프로젝트를 기술적으로 받쳐줄 핵심 연구기지로서의 역할도 기대된다. 게다가 이들 R&D센터를 통해 우리가 선진기술력 전수와 고급 기술인력 양성을 동시에 함으로써 우리 기술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또 이들 다국적 IT기업과 함께 세계 시장 개척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세계적인 IT기업의 R&D센터 유치는 한국이 기술력에서 크게 앞선 일본과 맹렬하게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미래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kr>
◆ 기고 - 동북아 R&D 거점국가로
최양오 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 수석부사장 yochoi@fairchildsemi.co.kr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시장이 지구촌 최대의 성장엔진으로 인식되고 있는 가운데 그 시장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다.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연구개발(R&D) 거점국가로 키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열기 위한 원동력의 하나가 첨단 기술력이라는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한국은 동북아 R&D 거점국가로서의 많은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중국이라는 거대시장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고, 인터넷 보급률 등의 정보화 지수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국의 우수 연구소와 첨단기업이 입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서 한국을 동북 아시아의 R&D 거점 국가로 키워 나가겠다는 정부의 의지도 강력하다. 첨단 기술개발과 테스트를 위한 IT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고 신제품을 출시해서 시장반응을 연구하기 위한 제품시장도 충분히 성숙해 있다.
짧은 시간에 완벽한 첨단제품을 만들어내는 한국 제조업체의 저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다. 반도체나 평면 디스플레이 등에서 일본에 비해 늦게 출발하고도 더 빠른 속도로 첨단 제품을 개발해 시장에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은 그 만큼 한국제조업체들의 R&D 능력이 우수하고 생산관리 능력도 탁월하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R&D의 기본은 우수한 인적자원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점에서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페어차일드가 ‘패키지 기반 기술 연구소’를 한국 내에 설립하게 된 것도 중국시장에 대한 접근성, 탁월한 IT 인프라, 경쟁력 있는 제조시설 등과 함께 한국 인적 자원의 우수성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R&D 거점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미 중국에는 모토로라, 노키아, 델 등 세계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의 R&D센터가 무수히 설립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들 중 상당수가 비교적 최근에 설립 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세계적인 기업들의 R&D센터가 중국으로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 내 우수한 연구 인력들의 저변 확대 때문이다. 자국에서 배출되는 우수인력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등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외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다수의 우수 인력들이 중국에 점점 늘어난다는 것은 동북아 R&D 거점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에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스탠다드화, 경제특구 건설, 외국인 투자 확대 그리고 물류 허브망 구축 등은 한국의 R&D 센터 유치를 위해 중요한 요건 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선결되어야 할 것이 우수인재의 확보 및 육성이다. 한국은 전자, 반도체, 이동통신 등 이른바 IT산업에서 많은 우수 인력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험과 높은 기술수준을 가지고 있다. 이는 70년대 기술중시의 사회 분위기가 그 근간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국의 우수한 인적자원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제 국가차원의 장기적인 인력양성 프로그램 및 여건 조성이 뒤따라 할 즈음이 아닌가 싶다. 미국은 이미 80년대에 국가적인 인재 육성 프로그램 운영으로 지금의 기술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기반을 쌓았다. 역사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떠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