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새로운 한해가 열렸다. 올 한해는 ‘믿을 신(信)’과 ‘새로울 신(新)’이라는 ‘신’의 두가지 화두에 기대를 걸어본다.
작년은 카드사태와 경기회복 부진으로 우리의 믿음이 철저하게 깨진 것이 사실이다. 경제와 정치전반에 걸쳐 불신감이 팽배했고 ‘우린 안돼’라는 패배감만이 가득찼다.
따라서 올해에는 경기회복에 대한 믿음, 할 수 있다는 믿음,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때다. 또 품질에 대한 믿음을 주고 고객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경영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른바 고객만족경영, 품질경영, 투명경영이 기업의 절대가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우울하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수백억원의 눈먼 돈을 정치권에 갖다 바치고 깨끗하다고 소문난 외국계 기업이 납품을 위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건네줬다는 뉴스가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기업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성인 1017명을 대상으로 기업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기업호감도지수(CFI)는 38.2점에 불과했다. CFI가 50을 넘으면 기업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50 미만이면 그 반대다.
이처럼 기업이 국민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투명경영 부재 때문이다. CFI를 요소별로 보면 국제경쟁력 향상(59.8점), 생산성·기술 향상(52.1점) 등은 호감이 높았지만 윤리경영은 9.6점으로 매우 낮게 나왔다.
비호감 이유로도 정경 유착(30.0%)과 분식회계 등 투명하지 못한 경영(28.7%)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이밖에 경영권 세습 등 족벌경영(16.1%), 근로자 희생 강요(12.9%) 등이 뒤를 이었다.
대한상의 측은 “대기업 비자금 수사로 기업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며 “기업들이 하락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로 하여금 기업의 투명경영 확보 방안을 마련하도록 만들었다. 정부는 지난 연말 기업 소유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성 강화 방안을 주요 골자로 하는 ‘시장 개혁 3개년 로드맵’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마련 중인 시장 개혁 3개년 로드맵은 △기업집단의 소유지배 구조개선 △출자총액 제한 제도의 합리적 개선 △선진국형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투명경영 및 책임 경영의 강화 △일부 기업 집단의 독립 기업화 및 소그룹 분화 등의 내용을 담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함성식 대신증권 연구원은 “정부의 시장 개혁 3개년 로드맵이 확정되면 기업들이 경영 투명성 확보 방안의 하나로 지주회사 체제를 강화하거나 지배회사의 대주주 지분을 늘리는 등 현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외국인들이 투명 경영을 강화하고 있는 기업에 대한 지분율을 높이고 있다는 점을 보면 투명경영이 기업 가치를 좌우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를 반영하듯 IT 업계의 대표 주자들인 통신과 SI 업체들은 투명경영 확보를 위한 자정작업을 펼치고 있다. 통신과 IT의 경우 대부분 대기업 소속 계열사로 지금까지 정치자금이나 분식회계 등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SK그룹 대선 비자금 사건에서 SK텔레콤으로 불똥이 튀지 않은 이유는 사외이사 비중이 50%에 달하는 SK텔레콤의 철저한 경영감시 구조 때문이다. SK텔레콤뿐 아니라 경영투명성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사외이사 비중이 KTF와 LG텔레콤 모두 50% 이상이다.
특히 KTF의 경우 사외이사가 오히려 과반수를 차지했으며,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도 사외이사 위주로 구성됐다. 덕분에 KTF는 작년 ‘공정거래의 날’ 시상식에서 대통령상을,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로부터 ‘지배구조 최우수기업상’을 각각 수상했다.
그동안 과당 경쟁과 덤핑 수주 등으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던 SI업계 역시 투명경영 바람이 불고 있다.
공정한 거래질서와 투명한 업무처리를 통한 윤리경영 풍토 확립이 기업 경쟁력과 이미지를 높이는 동시에 안정적인 수익원 확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판단에서다. 제살깎기식 불공정 경쟁이 국내 SI산업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반성과 더 이상 출혈경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 역시 투명경영을 거들고 있다.
◆ 윤리경영 사례
윤리경영 성공사례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기업이 미국의 제약, 생활용품업체인 ‘존슨앤존슨’이다. 이 회사는 1943년 미국 기업윤리 강령의 원조가 된 ‘우리의 신조(Our Credo)’를 제정했다.
‘우리의 신조’는 소비자·종업원·지역사회·주주의 순서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규정한 것으로 간결한 문장과 명확한 목표 제시가 특징이다.
존슨앤존슨의 윤리경영이 빛을 발한 것은 82년 미국 시카고에서 타이레놀을 사 먹은 7명이 사망한 일명 ‘타이레놀 사건’ 때였다. 경찰조사 결과 사망자가 복용한 타이레놀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고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즉각 시카고 지역에 판매된 제품의 리콜을 명령했다.
하지만 존슨앤존슨은 ‘고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무려 2억4000만달러를 들여 미국 전지역의 제품을 전량 회수하고 ‘원인규명이 될 때까지 복용하지 말라’는 소비자 경보를 발령했다. 제조과정을 비롯한 회사의 모든 경영 프로세스를 언론에 적극 공개하기도 했다. 결국 존슨앤존슨은 사고발생 후 기업 이미지가 더욱 개선됐고 타이레놀은 더욱 강력한 브랜드가 됐다.
안철수연구소는 투명경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국내기업 중 하나다. 이 회사가 신뢰를 얻는 것은 투명경영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안연구소는 제품 판매시 매출액의 절반만 회계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12개월에 걸쳐 추가해 나간다.
판매 후 1년간 고객지원을 제공하는 바이러스백신 솔루션의 특성상 판매액을 일시에 매출로 잡으면 판매 시점의 순익이 과대 포장되고 그 다음에는 매출 없이 관리비용만 들어가게 된다는 설명이다. 현금 흐름이 그대로 회계 장부에 반영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안연구소는 또 연구개발비를 당기 비용으로 처리한다. 제품 개발에 투여한 연구개발비는 무형자산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조항을 악용해 많은 회사들이 모든 인건비를 무형자산으로 처리하지만 이 같은 편법은 당장 그럴 듯하게 보여도 개발 실패시 부담으로 바뀔 수 밖에 없다.
포스데이타는 지난 6월 윤리규범 선포식을 갖고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포스데이타는 탈세, 회계부정과 같은 위법행위를 한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고 업무상 이해관계자에게는 경조사를 알리지 않는 등 구체적인 내부 자율규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하반기부터 상임감사를 자율준수관리자로 임명해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 수립과 집행과정 전반을 감독토록 했다.
◆ 기고 - "구성원 모두 따를 수 있는 행동원칙·공감대 필요"
이관응 엘테크신뢰경영연구소장 kwanlee@eltechtrust.com
“투명경영을 해야 한다.”, “정도(正道)를 걷겠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강조돼야 할 얘기는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명경영, 정도경영이란 말이 부각되고 회자되는 것을 보면 갈 길이 멀긴 먼 모양이다.
지난 세기말 외환위기란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 한국의 기업 사회가 구각을 깨고 거듭나려는 노력을 보이는 것만은 분명하다. 출발이 자발적인가 전적으로 타의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만큼 시대가 성숙한 것이며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는 대세를 맞았다.
기업지배구조, 거래관계, 회계처리 등과 관련해 ‘보다 깨끗한’ ‘한층 떳떳한’ 경영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본격화되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투명경영, 정도경영, 윤리경영, 신뢰경영 같은 단어들이 난무한다. 진리는 통하듯, 이들 단어는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결국은 같은 뜻이다.
투명하게 하는 것이 정도를 지키는 것이며 그것이 윤리적인 것이고 신뢰를 얻는 길이다. 다만 곁가지들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예컨대 엘테크신뢰경영연구소에서 주창하고 있는 신뢰경영은 안으로부터, 내부 구성원들로부터 먼저 신뢰를 얻고 그것이 사회적 신뢰로 연결되도록 하자는데 역점을 둔다.
우려하는 바는 그것이 액자 속의 경영방침으로 머물게 되는 상황이다. 사실 어느 회사를 다녀봐도 경영철학이나 방침은 훌륭하다. 왜냐하면 옳은 말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의 구성원 누구도 그 철학과 방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액자속에 묻혀 뿌옇게 먼지만 쌓여간다. 질책을 하고 단죄를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로는 간단하지만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는 ‘쉬운 말로 해석하기’를 시도해야 한다. 투명경영을 한다는 말은 내걸어놓는 캐치프레이즈에 해당된다.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으면 그것에 맞는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행동의 준칙들이 세세히 마련돼야 한다. 예컨대 구성원들이 접할 수 있는 100가지의 상황을 가정하여 각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문서로 만들어 공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해 투명경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가령 거래처로부터 10만원 이상의 금품 향응은 어떤 경우라도 받을 수 없다는 행동 준칙을 만든다. 명절이라고 선물이 들어왔는데 A상점에서는 9만9000원이고 B상점에서는 11만원인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상황을 상정하여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기준을 들이댈 것인가를 정하는 노력은 때로 비효율적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러나 행동의 준칙을 세우는 ‘서비스’ 행위는 그것을 사용하는 구성원이 지키기 좋게 만들어져야 한다. 관점에 따른 약간의 비효율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결코 투명경영이란 대어를 낚을 수 없다.
둘째로 투명 정도 윤리 신뢰의 경영 철학을 공동의 가치로 만들어가야 한다. 은행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의 불친절은 여직원의 불친절로 끝나지 않는다. 즉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 여직원이 은행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며 곧 은행의 불친절이다. 공동의 가치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해당 조직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고 모두가 따라야 하는 가치가 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는 지키고 누구는 지키지 않는 원칙은, 설령 10명이 지키고 단 한 명이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해당 기업을 놓고 보면 지키지 않고 있는 셈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반복적인 교육과 가치 준수를 끌어낼 수 있는 메리트 시스템을 갖추는 노력이 뒤따라야만 한다.
두 가지, ‘쉬운 말로 해석하기’와 ‘공동의 가치로 만들기’는 요약컨대 기업 문화로서 침투시키는 작업이다. 문화는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토대를 이루는 부분이다. 뇌물을 받고 숨기는 행위를 보면서 모든 구성원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란 지적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펼쳐졌을 때 비로소 투명 정도 윤리 신뢰의 경영이 문화로서 정착됐다고 말할 수 있다.
정말 경계해야 하는 것은 투명경영, 정도경영, 윤리경영, 신뢰경영 마저도 한때 유행을 쫓아 시도해보는 경영기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빠른 변화를 기본 조건으로 경영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때문에 이런 저런 경영기법들이 시도되고 거듭 교체된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변치 않아야 하는 경영의 기본 철학과 방침이 바로 서야 한다. 투명경영 신뢰경영은 바로 그같은 범주에 놓인 것으로 파악돼야 한다. 새해에는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이 많아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