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 좌담회]IT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정보기술(IT)강국을 목표로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나라, 정작 꿈에 가깝게 다가가자 허탈감만 밀려온다. IT강국만 되면 우리 산업과 경제는 물론 정치와 사회, 문화까지 몇 단계 성숙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다. ‘IT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하는 의문이 새삼 고개를 내민다. 전자신문은 이 답을 얻기 위해 지난해말 각 분야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아 의견을 들어봤다. 참석자들의 결론은 ‘그래도 IT가 세상을 바꾼다’였다. 다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현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미래를 전략적으로 예측하는 연구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데 참석자들은 공감했다. 이들은 또 IT로 인한 기존 구조의 해체와 탈권위적 흐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새로운 중심을 잡기 위한 대안을 다각도로 제시했다. 각 분야 토론자로는 정통부의 ‘IT의 사회문화적 영향연구, 21세기 메가트렌드’ 프로젝트의 분야별 기획총괄위원이 모두 참석했으며, 정보화정책을 집행·연구하는 정통부 변재일 차관과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이주헌 원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토론자

 변재일 정보통신부 차관

 이주헌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이지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양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성국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

 이택 전자신문 편집부국장

 ▲장소 및 일시

 웨스틴조선호텔 코스모스룸.

  2003년 12월 24일 오전

 

 ◇사회 이택 전자신문 편집부국장=90년대 초 우리가 언급한 IT와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IT는 그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 IT의 의미변화를 먼저 짚어보자.

 ◇이주헌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10년전 IT는 비교적 시간을 절감해주는 이기(利器)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인이자 사회변화의 촉진제, 미래개척의 동인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IT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은 우문이라고 본다. 충분히 바꿀 수 있고 한단계 더 나아간 논의도 가능하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이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택=정보화 정책도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정보화를 주도해온 정보통신부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변재일 정보통신부 차관=사회변화는 예상을 자주 벗어났다. 정보화 추진단계에서 인터넷으로 인한 인간소외를 우려했다. 그런데 오히려 IT가 현실공간의 접촉을 늘리는 역할을 했다.10대에서 두두러졌다. 지난해 촛불시위, 월드컵, 대선으로 이어지는 사회현상도 우리나라에서만 특별히 나타난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온 사회규범이나 법제도로 예측이나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정보화를 이끌어온 40∼50대는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따라서 변화에 대한 심층적 연구로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 기존 정보화정책의 뼈대는 지속적으로 끌고 가며 학제간 연구결과를 토대로 투명성·효율성·생산성과 같은 변화 방향을 이끄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택=IT가 세상을 바꾸는 데 대부분 공감했다. 정치·경제 등 각 분야별로 변화를 살펴보고 과연 이런 변화가 구조적 변화 요인이 될 지 의견을 듣고 싶다. 우리 경제구조의 전환이 난관에 부닥쳤다. 신경제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네트워크 기업, 전자상거래로 대표되는 디지털경제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구조 전환과 체질변화에 주도적으로 구실할 수 있을 것인가.

 ◇이지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디지털경제는 앞으로 우리 경제의 구조전환과 체질변화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97년 시작한 변화가 지금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보이나 근본적인 구조변화와 체질개선이 진행중이다.

 디지털경제로 대표되는 기술변화는 경제활동의 변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 이는 거래비용절감과 수확체증의 법칙, 지식노동자탄생 등으로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놓는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경제제도와 관습, 정책과 인식이 경제가 디지털화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 우려된다. 첫째 경제적 자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점, 둘째 관에 대한 의존이 큰 점, 셋째 모든 사람이 똑같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의식의 팽배, 넷째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한 폐쇄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관념이 경제제도·정책은 물론 경제주체간 관계로 구조화해 나타나는 게 문제다. 교육제도, 기초R&D 등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하면서 디지털경제의 부작용을 방지하는 정부와 민간의 공동 노력이 요구된다.

 ◇이택=인터넷선거, 디지털정당 등 정치영역에서 IT가 새로운 변화요인으로 떠올랐다. 지난 대선에서 이를 실감했다. 디지털정치가 정치개혁의 전기가 될 수 있나, 아니면 그저 포장술에 불과한 것인가.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디지털정치는 ‘제2의 구텐베르크 혁명’이다. 정보독점을 깨뜨려 종교개혁을 이끈 것과 같이 인터넷이 가진 양방향적 의사소통은 ‘대의민주주의’의 획기적인 혁신을 가능케 한다. 인터넷의 의사소통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무너뜨린다. 정보권력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인터넷민주주의가 본격화한 지난 대선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대결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이 영향으로 모든 정치세력이 인터넷에 관심을 갖고 디지털정치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인터넷으로 변화하는 정치개혁운동에 인터넷선거, 디지털정당, 인터넷정치헌금 등이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면 당조직을 경량화하면서 당원에 대한 고객만족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소수파 정당이 대형 정당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 미국식 ‘개방국민경선(open primary)’도 가능할 것이다. 정치자금문제 해결을 위해 인터넷을 통한 소액다수 헌금제 정착도 기대할 수 있다. 이같은 변화에 걸맞은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노사모,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불법 판결받은 게 대표적 사례다. 이밖에도 사이버선거감시반을 만들어 인터넷 정치윤리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택=IT는 개인과 사회도 바꾼다. 일상생활과 미디어 소비, 커뮤니케이션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리고 새로운 문화체계를 창출하는 IT가 미래 우리 문화에 미칠 영향은 어떨 지 전망할 수 있나.

 ◇최양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게 있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인간이 일과 놀이를 한다는 게 변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부와 권력이 비대칭적으로 분배된다는 것도 바뀌지 않는다. IT로 인해 변하는 것은 일과 놀이의 형식,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이다.

 IT가 보편화될 미래에는 부와 권력의 편중 양상이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힘 센 사람이, 산업사회에서 머리좋은 사람이 부와 권력을 가졌다면 미래에는 창의적인 사람이 이를 가져갈 것이다. 변화는 이미 급속히 진행됐다. 변화의 방향을 몇가지 짚어보면 사회활동의 ‘사사화(私事化)’다. 예를 들어 홈비디오의 등장으로 영화관람이 공적활동에서 사적활동으로 변화했다. 영화 소비층이 변하면서 내용도 바뀌었다.

 동시에 전지구적 관심사가 등장하는 변화도 생겼다. 앞으로 국가단위 문화양식은 쇠퇴하는 반면 세계적인 소수마니아 문화가 주로 등장할 것으로 본다.

 대면 커뮤니케이션도 확장될 것으로 본다. 몸에 칩을 내장하는 현실이 다가오면서 자신과 환경을 매개하는 몸의 중요성도 강조될 것이다. 의식을 거치지 않고 몸과 환경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양상이 드러날 것이다. 반대로 우리 문화가 IT를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살펴보면 오락적 측면이 강하다. IT기술이 오락, 재미와 상관관계를 가지며 빠르게 확산된다. 주변문화와 중심문화간의 상호역동성이 주요관심사로 등장하며, 세대간 문화단절의 문제가 새로 등장했다.

 ◇이택=IT가 가져온 역기능 문제가 거론된다. 자살사이트 같은 사회병리현상, 개인프라이버시 문제 등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의 권위도 해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IT가 변화시킨 사회는 규범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정보사회를 철학적으로 볼 때 현상적·경험적 입장과 규범적·처방적 입장을 구분해야 한다. 10년뒤 예측은 현상의 투사에 불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보사회의 인식은 다중자아가 준거점이 된다. 근세에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가 사유의 주체로서 개인의 출발점이었다면 정보사회의 ‘접속하는 나’는 자아의 다중화와 해체를 의미한다.

 사회와 공동체관에 있어서 개별국가의 형성이 중요한 근세와 달리 정보사회에서는 국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개체들의 다양한 접속에 바탕한 지구촌 공동체가 구성될 것이다. 다중자아는 억압된 측면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해방적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범죄적 측면도 함께 가진다. 인지적, 도덕적 과제가 생긴다.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국가개념은 무정부적, 자유방임적 사이버 공간의 질서잡기가 새 과제로 도출된다.

 지난해 세계정보정상회의(WSIS)가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 IT도 중요하지만 IT가 인간적으로 선용될 수 있는 문화적, 윤리적 환경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회의는 IT라는 용어대신 ICT(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를 공식 채용했다. 정보기술 이상으로 중요한 게 정보와 더불어 대화하고 의사소통하는 사회건설이라는 뜻이다. 대화없는 세계화는 획일화고 대화없는 지방화는 파편화라는 것이다.

 ◇이택=인터넷으로 인한 시민운동의 활성화도 새로운 흐름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역기능도 있다. IT가 우리사회를 변화시켜온 힘의 축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김성국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붉은 악마, 촛불시위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활용한 시민운동의 힘을 분명히 보여줬다. 앞으로 인터넷시민운동은 전지구적 시민사회를 구축할 것이다. 일부 역기능과 시민사회가 급격히 진행되는 데 따른 난맥상이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조직성을 발휘, 질서를 찾아갈 것이다.

 시민사회의 결집과 지식노동자의 출현으로 앞으로 노동운동세력도 시민사회세력의 일부로 편입되거나 양자간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권력, 자본권력이 약화되는 중심축 이동이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IT와 네트워크의 확산, 민족적 특성이 겹쳐 시민사회 구축이 보다 용이했다. 연고주의 문화가 긍정적으로 활용되면 세계에서 보기 힘든 공동체적 네트워크 확산도 가능하다.

 ◇이택=분야별 깊이 있는 분석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IT의 사회변화 연구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

 ◇변재일=지금까지 연구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으나 정치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들은 깊이있는 연구가 부족했다. 오늘 각 분야의 연구 결과로 ‘트렌드’ 확보가 가능해졌다고 본다. 정부가 추진하는 IT허브전략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사회현상과 분석으로 깊이 있게 연구를 지속해야 한다. 기술변화 추이전망도 함께 다뤄야 해 기술분야 연구자와의 학제간 연구를 추진하겠다. 정부입장에서 연구결과를 행정혁신 차원의 전자정부 논의에서 한단계 나아간 정부의 역할변화로까지 활용할 수 있다. 사회변화에 따른 정부 역할 변화는 시민이 정부를 통제하는 것까지 거론해야 한다.

 ◇이주헌=IT야 말로 학문 분야별 협동이 가능한 새 학문이다. 지금까지 미래연구가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미래연구는 시장의 기능이 서구사회나 미국에 비해 약한 우리나라에 적합하다고 본다. 기술로드맵을 염두에 두고 단순한 예측이 아닌 우리의 전략까지 생각하는 ‘공격적인 미래학’이 됐으면 한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연구한 다음 이를 우리의 현실로 이끄는 방향성 제시가 돼야 한다.

 <정리=김용석기자 ys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