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nano) 기술과 은(銀), 그리고 가전의 만남’
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살균 재료로 널리 사용돼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살균 소독을 위해 은 판자를 사용했다고 하며 미국 서부개척시대에는 우유 그릇 속에 은화를 넣어 우유를 오래 보관했다고 한다. 또 인도에서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은 은막으로 싸서 보관하기도 한다.
동의보감에는 은이 간질 및 경기 등 정신질환과 냉대하와 같은 부인병 예방 및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본초강목에는 은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오장이 편안하고 심신이 안정되며 나쁜 기를 내쫓고 몸을 가볍게 해 명을 길게 한다고 돼 있다.
현재 나노기술이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는 분야 중 하나가 가전이다. 살균에 탁월한 힘을 발휘하는 은이 적은 양으로도 높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나노기술과 결합해 항균 기능을 강화한 가전제품들이 속속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우일렉트로닉스가 나노와 은을 결합한 ‘나노실버’ 양문형냉장고를 내놓은 것을 계기로 이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가전업체들이 너도나도 백색가전에 은나노 기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는 물론 에어컨·세탁기·공기청정기·김치냉장고까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가전제품에 은나노 기술이 적용됐다.
은나노 제품은 은을 1나노미터로 쪼개어 제품에 코팅을 하거나, 재료와 혼합해서 제작한 제품을 말한다. 가전 업체들은 냉장고나 에어컨 등에 은 입자를 함유시킴으로써 세균 및 곰팡이가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을 미리 억제시켜 뛰어난 항균효과를 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냉장고에 적용하면 음식을 더 오래동안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고 세탁기에 적용하면 옷감에 세균이 번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호흡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에어컨에 사용되면 신선한 바람을 맞는 효과를 낸다.
삼성전자 양혜순 책임연구원은 “은은 한번 제품에 적용하면 약 10년간 보존되기 때문에 오래동안 살균 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볼 수 있다”며 “하이테크놀로지로 인식돼온 나노기술이 소비자와 밀접한 가전에 적용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가전업계가 은을 가장 먼저 제품에 결합한 이유는 단순하다. 제품에 적용하기가 가장 쉬울 뿐 아니라 가시적인 효과도 빨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을 미세하게 쪼깬 나노 상태의 파우더를 플라스틱 재료에 섞어 제품의 일부로 만들어 내거나 코팅재료로 만들어 바르는 등 비교적 쉬운 작업과정만 거치면 상품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나노튜브나 DNA 형성과 같은 어려운 기술이 필요없기 때문에 아이디어와 수요만으로 우선 상품화가 가능했다.
이처럼 은나노 기술이 가전분야에 적용되면서 업계에 친건강 친환경 바람, 더 나아가 사회적 화두 중 하나인 웰빙 시대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 가전이 생활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단순 기기 수준을 넘어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도록 산업 트렌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또 그동안 살균 효과를 알면서도 원가상승 등의 요인으로 은을 적용하지 못하다 극소량으로도 높은 효과를 내는 나노기술을 결합하면서 경제성면에서도 진전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나노 가전이 앞으로 은 뿐만 아니라 제2, 제3의 소재와의 결합을 통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 나노기술은 이론적으로 모든 산업분야에 적용가능하지만 가전 분야에 특화시켜 보면 센서를 미세하게 쪼개 나노기술과 결합하면 획기적인 상품의 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냉장고 내부에 각 저장용기마다 온도와 습도, 부하의 상태를 알 수 있다면 센서는 온도나 습도, 전류 등의 상태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며 가전은 물론 대부분의 기기에 들어가 있다. 센서를 나노기술과 결합하면 미세한 센서 여러개를 하나의 제품에 탑재해 각각의 고유 기능 연출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냉장고에 나노센서를 적용하면 각 그릇마다의 온도를 측정해 적합한 온도로 맞춰줌으로써 각 식품마다 최적 온도를 유지하게 된다. 각 용기마다 식품이 최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고 식품이 다 떨어진 것까지 감지해 식품회사에 자동으로 주문을 넣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심지에 식품이 상한 경우 초소형 냄새센서가 이를 감지해서 경고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집안의 모든 기기를 네트워크화한다는 유비쿼터스 개념이나 홈네트워킹 트렌드와도 충분히 연계된다.
다만 상용화의 가장 큰 이슈이자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원가상승 부분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야 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대우일렉트로닉스 한인철 책임연구원은 “나노가전은 앞으로 은 뿐만 아니라 자외선을 쪼이면 광촉매 작용을 해 살균효과를 낼 수 있는 산화티탄 등 다양한 소재와의 결합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발, 새로운 상품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경원기자 kwjun@etnews.co.kr>
◆ 기고 - 한인철 대우일렉트로닉스 냉기연구소 책임연구원
최근 가전제품에 급속하게 채용되는 나노실버는 나노기술이 사용현장의 요구와 잘 맞아떨어진 사례를 보여준다. 은(실버)은 옛날부터 수저나 목걸이 팔찌 등으로 사용되어왔다시피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항균제였다. 그러나 이 은이 널리 사용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은을 나노 사이즈로 만들면서 경제성을 갖출 수가 있었다.
과거 배웠던 수학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물체의 길이가 두 배로 커지면 외표면적은 22인 4배가 되고 체적은 23인 8배가 된다고 배웠다. 반대로 생각하면 은 입자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 때 외표면적은 1/4로 줄어들고 중량은 1/8로 줄어든다. 세균과 접촉하는 은 입자의 외표면적이 같으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은 입자의 크기를 반으로 줄일 때 중량을 반으로 줄여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은 입자를 나노 사이즈로 줄일 때 크기를 약 천분의 일로 줄인다고 할 경우 과거의 천분의 일만 넣어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은 입자를 나노 사이즈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국내의 관련 벤처기업들은 은을 나노 사이즈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채용한 제품이 출시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경제성 있고 안전한 항균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나노실버는 거의 모든 가전, 주방 기기에 채용되고 있다. 식품저장이 주기능인 냉장고 내부의 구성부품과 저장용기에 나노실버를 사용할 경우 식품 저장기간이 연장된다. 도마와 같이 물과 자주 접하는 주방기기, 물때가 자주 끼는 세탁기의 세탁조,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손잡이 부위, 특히 세균번식이 문제되는 에어컨에서 공기가 통과하는 덕트부품, 화장실 비데 등에 채택돼 효과를 보고 있는 상태다. 얼마 전부터는 팬티 등의 내의, 땀을 많이 흘리게 되는 스포츠용 의류 등에도 채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질이 나노상태에 가면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물질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다. 또한 나노 사이즈에서의 구조나 성분의 조작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특성의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은의 경우 은수저나 은팔찌에서 보듯이 우리는 은백색으로 알고 있으나 나노상태로 가면 오히려 흑색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탄소봉은 전기를 통하는 도체이나 나노튜브 상태에서는 반도체의 특성을 가지고 철보다 천배 강한 물질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나노에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작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작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 어느 곳에서나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비자와 항상 접하는 가전제품의 특성상 나노기술은 점차 확대 채용될 것으로 판단되며 이로 인해 소비자는 더욱 좋은 제품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가전의 총아로 등장하는 HDTV의 경우 선명한 화질이 필수적이다. 나노입자를 이용한 발광소자가 만들어진다면 더 적은 전력소모로 더 밝고 선명한 화면을 볼 수 있다. 고성능 초소형 PC의 개발로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보여주었던 눈으로 인식하면 동시에 물체의 정보가 같이 나타나는 일이 이제는 현실로 가능해진다.
나노기술은 그 기술의 파급효과로 볼 때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으리라 예상된다.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서서히 변화는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 그 변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