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8년 말 실리콘 밸리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IMF 때 판매대금 상환 연장을 위해 실리콘 밸리로 떠나서 1년여만에 기술용역을 통해 상환대금을 갚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창업 때부터 친구였던 레디시스템의 짐 레디 사장이 실리콘 밸리에서 동업을 계속하자고 제안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짐과 함께 ‘모타비스타(지금은 레드햇에 버금가는 리눅스 전문 회사로 성장했다)‘라는 회사를 설립, 리눅스사업을 시작했지만 리눅스 관련 순수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짐에게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기술적인 도움을 계속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리눅스 기반의 소형 라우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이쎄일 사업도 시작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떠오르는 사업으로 생각한 시스코사의 네트워크 장비와 이베이의 인터넷 경매 사업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쎄일의 인터넷 경매 사업은 1위 업체인 옥션과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셀피아와 합병을 하게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라우터 사업은 스위치-메트로이더넷-스위치-VDSL 사업으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산 네트워크 장비 사업에서 1위 업체로 성장하게 됐다.
다산이 처음 네트워크 장비 사업에 뛰어들 때만해도 시스코사의 네트워크 사업은 타 경쟁업체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기술장벽이 높은 사업에 속했다. 당시 다산은 리눅스 기술을 기반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다행히 이같은 새로운 시도가 고객들에게 먹혀들었다.
현재는 대부분 국내 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초고속인터넷서비스 사업의 액세스 장비는 더 이상 시스코사의 제품이 아니라 다산과 기타 국산 장비로 채워지고 있다.
만약 어려운 네트워크 프로토콜 소프트웨어를 시스코 방식으로 따라서 했다면 이런 첨단 제품들이 상품화되는데 10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상용 네트워크 칩 기반의 하드웨어 플랫폼에 리눅스를 활용, 상용 네트워크 제품을 만들겠다는 제품 전략은 다산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며, 첫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국내 중소 벤처 기업들과 중국의 후발 업체들이 다산의 전략을 따라 많은 네트워크 제품을 상용화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제품 개발로 구체화시켜 나간 다산연구소의 핵심 연구원들의 공로가 무엇보다 크다. 돌이켜보면 무모하다 싶었던 다산의 네트워크 장비 신규 사업 진출은 그해부터 지난 2000년까지 이어진 벤처 돌풍에 힘입은 바가 컸다. 지금 처럼 가라앉은 IT분위기에서는 결코 이런 저돌적인 벤처 정신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장 눈 앞의 수익성만을 기업평가의 잣대로 들이대는 시장 풍토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전하는 창업 정신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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