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계에는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처우개선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고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올해 임단협의 핵심 요구사항으로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처우개선을 내걸었으며, 특히 민주노총은 연일 이 사안에 대한 투쟁으로 정부와 재계에 맞서고 있다.
노동부 역시 지난 4일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을 포함해 노사관계 법·제도 개선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도 밝혔다. 한 비정규직 근로자의 분신으로 이들에 대한 처우개선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지만, 낙후된 노사 관련 법·제도로 인해 언제 어떻게 촉발할지 모르는 사안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하나씩 사회적 이슈로 곪아터지기 전에 이를 개혁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단호한 의지다.
지난 연말 노동부가 발표한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 방안’ 역시 정부의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이 방안이 노조측의 입장만을 대폭 수용한 결과라고 반발했으며, 노동계 역시 개악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지난 4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 방안을 추진해 연내 마무리한다는 입장을 또다시 강조, 갈등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 방안= 이 보고서는 단결권·단체교섭·노사협의제도·쟁의행위 등 노사 관련 전반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의 내용을 담았다.
연장근로나 심야근로, 연월차 휴가수당 등 산출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에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정기 상여금을 포함시키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기업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용자가 불법 파업에 대한 직장폐쇄 등 부당노동행위를 했을 때는 현행대로 형사처벌을 받도록 하는 등 형사처벌 규정은 현행대로 존속시키도록 했다. 공익사업장 근로자에게 적용하기로 했던 긴급복귀명령제는 노동자에 대한 지나친 규제라는 노동계 의견을 수렴해 전면 백지화했다.
◇김대환 장관의 대통령 업무보고=지난 4일 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올해 주요업무 계획은 크게 △비정규직 보호 △일자리 창출 △주 5일 근무제 시행 △외국인 고용허가제 정착 △퇴직연금제 도입 △공무원 노동기본권 보장 △노사갈등 관리 등이다.
노동부는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연내 차별해소 및 남용규제 법안을 입법화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할 계획이다. 또 퇴직연금제를 연내 입법화하고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방안을 하반기 중 입법추진할 예정이다.
◇해외선진사례= 자본주의 태동지인 유럽의 노사정협의제도는 각 국가가 가지는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상황에 의존하면서 다양한 형태와 제도로 발전해 왔다. 특히 유럽의 노사정협의 제도가 영미식 다원주의 체제와 구별되는 것은 정책을 둘러싼 노사정간의 협의가 제도적으로 보장됨으로써 노동자와 기업의 주장이 정책결정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유럽에서도 노사정간의 정책협조가 체계적으로 발전한 나라들은 몇가지 공통적 특징을 가진다. 대표적인 노사정협의 국가로 평가되고 있는 네덜란드·아일랜드·독일 등은 국가경제적 위기라는 상황이 노사정간의 정책협조를 촉진시키는 요소로 작용해 왔다.
네덜란드는 70년대의 만성적 재정적자와 고도의 실업률에 대응해 노사가 임금을 억제하고 고용을 창출하자는 노사협약을 도출함으로써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했다. 아일랜드는 70년대 초반 국가경제위기를 맞아 노동계의 주도에 의해 국가적 차원의 3개년 위기극복 프로그램을 노사정이 협의하고 타결함으로써 1990년대를 통해 10년 이상동안 성공적으로 외자를 유치하며 유럽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들 지역국가들의 또 다른 특징은 노사정 3자 대표가 산하단체 및 기관의 정책적 입장을 기반으로 논의에 앞서 분명한 대안을 가지고 협의에 임하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협상과 타협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노사정협의제도가 정착하게 된 것은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그들의 정치사회적 배경에도 기인한다. 이러한 제도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동등한 입장에서 노사정 협의에 참여한 모든 당사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사회적 협의체제의 공익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선진적 노사 관계 정립을 위한 과제= 유럽의 선진사례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사 양측이 대화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양측이 주장해 온 대로 현재의 노사관계법과 규정을 개혁해야 한다면 정부가 만든 방안을 토대로 적극적인 협상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부 역시 선진국 수준의 노사관계법·제도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한쪽에 치우치거나 정치적·정략적 상황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노사정위원회 한 관계자는 “노사정 모두가 개혁을 위해서는 양보와 협상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길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노사화합 우수사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노동계로부터 각종 사회적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여 기업 환경은 더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가운데, 노사가 화합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이루고 있는 기업들이 있다. 고용주-고용인 관계를 협력적 구조로 바꾼 LG전자가 대표적이다.
LG전자는 ‘노사(勞使)’라는 말 대신 ‘노경(勞經)’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노사관계라는 말이 갖는 상호 대립적이고 수직적인 의미를 대신해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勞(노조)’와 ‘經(경영자)’이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함께 가치를 창출한다는 신개념의 노사관계를 의미한다.
이 회사가 이처럼 노·사 간의 관계를 협력적인 개념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지난 87년과 89년 겪었던 ‘내홍’의 경험이 뒷받침 됐다. 당시 LG전자는 노측과 사측이 한치의 양보 없는 대립을 보이면서, 매출 손실 6000억 원에 파업손실 일수 50일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이후 사측과 노조는 한 발씩 양보하기 시작해 협력관계로 돌아섰다. 사측은 경영실적을 투명하게 설명했으며, 경영성과를 바탕으로 임금인상안을 제시했다. 노측도 사측의 상세한 설명에 따라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됐으며, 사측이 제안한 사안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다른 대기업에서는 춘투가 한창이지만, 이 회사에는 지금까지 임금인상과 관련한 분규가 없다. 오히려 지난해에는 노조 측에서 경영층과 함께 고민한 결과로 이익 가운데 일부를 R&D 투자비로 다시 내놓기도 했을 정도다. 최근 몇 년 동안 대기업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임단협을 마무리 짓는 기업이 됐다.
이 회사는 올해에도 노·경간 별다른 충돌없이 무난히 단체교섭을 마무리지었다. 지난달 26일 열린 ‘2004년 임금 및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단체교섭’ 자리에서 LG전자 노측과 경영자측은 물가인상과 생산성 향상을 감안해 기준 임금대비 6.1%의 임금인상안에 합의했다. 또 선 경쟁력 확보, 후 성과보상이라는 LG전자 노경 전통에 따라 향후 성과에 따른 보상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이날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은 “ LG전자의 노경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조기에 임단협을 타결하게 돼 경영활동에 큰 힘이 될 것 같다.”라고 강조하고 “가치창조적 노경 관계라는 LG전자만의 경쟁력은, 분명 LG전자가 전자 정보통신업계에서 글로벌 톱3로 우뚝 서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기고-이상희 산자부 장관노사자문관
우리 경제는 힘있는 노조에 의한 과도한 노사갈등에 발목이 잡혀있고 그 와중에서 취약근로자에 대한 격차의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지 않고는 우리가 지향하는 △동북아 경제중심 △소득 2만 달러시대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노사관계 개혁의 비전과 방향을 마련, 이를 추진코자 했다. 그 개선 노력중 하나인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 방안이 지난해 12월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 방안’(이하 선진화 방안)으로 구체화됐다.
정부가 선진화 방안을 통해 주력한 것은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제도 △자율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공정한 게임의 룰 정립 △변화하는 노동환경에 적응하는 고용의 유연 안정성 도모 △우리사회의 현실 고려 등이다. 마련한 주요 골자는 국제노동기구(ILO)로부터 지적돼온 노조활동에 관한 권리 정비, 분쟁을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갈등조정 시스템의 재편으로 집약할 수 있다.
선진화 방안 마련과정에서 그간 노사정위원회의 논의로부터 쏟아져 나온 노사간의 현실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요컨대 선진화 방안은 국제기준을 고려하되 한국적 현실을 고려해 현재 문제가 되는 집단적 노사관계법상의 규정들을 갈등조정의 차원에서 질서형성을 도모했다. 그러나 노동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동법과 노동시장의 연계 제고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도산절차시 정리해고 요건 및 고용승계 배제와 같이 주변적 개선에 머물고 말았다.
선진화 방안은 논의를 위한 기초자료에 불과하므로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노사의 몫이기 때문에 성급한 비판까지는 불필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 노사관계법·제도 개선은 이해 당사자간의 갈등 조정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시장에 대한 적응력 제고와 분배의 재원인 성장을 견인할 수 있는 생산적 노사관계의 정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시장이 용납하지 않는 노사관계는 각국에서도 현실적 고민으로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시장에서 화두는 경쟁력 있는 노사관계와 이를 위한 당면과제로서 일자리 만들기라 할 수 있다. 흔히 경쟁력 있는 노사관계로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거론된다. 일자리 제고로서 선진화 방안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선진화 방안에서 일자리 제고 내용은 정리해고 협의기간 단축, 도산시 정리해고요건 및 사업양도에서 고용승계에 대한 적용 배제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가 노사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도 신중한 개선안이라 할 수 있다.
세계시장은 냉혹하다. 우리 노사관계법은 시장경제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경직적 해고보호 규정 완화, 취업희망자들 이익 고려, 일자리 보장과 근로조건 인하의 연계, 실업극복과의 연계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고용불안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지만, 노동시장의 경직화가 가져오는 커다란 폐해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 세계 각국의 경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은 해고보호 규정의 완화보다는 임금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경직성 완화 검토가 보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구체적으로 △임금피크제 도입 △성과주의 임금체계 도입 △이러한 내용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취업규칙 변경절차의 간소화 △변경해약고지제도 도입 등을 위한 법제의 정비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상희 산자부 장관노사자문관 2038ls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