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은 지난 96년 한국에서 CDMA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독점적 칩 벤더의 지위를 누려 왔다. 한국이 한국 정부와 업계가 디지털 이동전화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퀄컴 기술만을 도입키로 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최대 CDMA 휴대폰 수출국 도약”이라는 찬사와 함께 “10년 후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정책”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 왔다.
그러는 사이 퀄컴은 조그마한 벤처기업에서 세계적인 반도체업체로 성장했다. 한국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퀄컴은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국내 휴대폰업체에 관행처럼 불공정 거래를 일삼아 왔다. 최근 칩 부족 사태가 대표적이다. 한국 휴대폰업계는 퀄컴의 계약 불이행에도 보복이 두려워 불만조차도 터트리지 못하는 상태까지 왔다.
업계에선 급기야 퀄컴이 전향적인 자세로 나오지 않는 한 퀄컴을 견제할 수 있는 칩 벤더가 국내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보통신지적재산협회(ITIPA)의 관계자는 “한국 이동전화 표준인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의 칩 벤더를 이원화하는 방안을 협회차원에서 마련해 정부에 강력하게 건의할 것”이라며 “정보통신부가 나서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등 CDMA칩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들의 국내 진출을 독려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퀄컴 외에 CDMA칩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는 미국의 TI와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대만과 한국의 벤처기업들도 CDMA칩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 중 국내 휴대폰업계의 가장 주목을 받는 업체는 TI다. 세계 최대 GSM 칩 업체인 TI가 퀄컴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벤더라는 인식 때문이다.
휴대폰업체 T사의 고위관계자는 “TI가 CDMA 칩 시장에 진출하면서 고압적이던 퀄컴의 자세가 달라졌다”며 “상용화가 남아 있지만 TI가 퀄컴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국내 최대 휴대폰 메이커인 삼성전자도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가 베이스밴드 칩 벤더는 아니지만, 자체적으로 3G 칩을 개발할 정도로 기술력을 갖고 있는 데다, 300여명의 연구개발(R&D) 인력이 칩 개발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국내 일부 모델에 독자칩을 탑재해 판매중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하루 빨리 CDMA 칩 복수 벤더 시대를 열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CDMA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중심으로 휴대폰업계가 뭉쳐 ‘한국형 CDMA칩’을 개발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역할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중견업체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만이 퀄컴을 견제할 수 있다”며 “삼성전자 중심으로 국내 휴대폰업체들이 뭉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퀄컴에 대항할 수 있는 칩 벤더가 눈에 띄지 않는다. TI나 삼성 모두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이 퀄컴에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이동전화서비스는 2세대를 넘어 3세대로 접어들었다. 국내도 CDMA에서 WCDAM로 바뀌고 있다. 더이상 퀄컴만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는 힘들 것이다. GSM 기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퀄컴이 한국 휴대폰업체들과 ‘행복한 시간’을 더 갖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바뀌어야 한다. 국내 휴대폰업계도 더이상 퀄컴에 의지하고 싶지 않다면 업계 공동으로 복수 칩 벤더를 육성하는 전략적 아이디어를 모아야 할 것이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김규태기자 star @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