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동통신업계와 퀄컴의 인연은 90년대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당시 아날로그 이동전화 방식을 대체할 디지털 방식으로 유럽형 이동전화(GSM)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때 미국의 벤처기업인 퀄컴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한국은 모험을 감행했다. ‘100% 실패로 끝날 것’라는 GSM 진영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퀄컴과 함께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에 성공한다.
이후 10여년이 흘렀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이동통신 강국으로 우뚝 섰다. CDMA 휴대폰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점유율 1, 2위를 다투고 있다. 퀄컴은 인텔과 견줄 정도로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성공에 취해서일까. CDMA 성공 신화의 파트너인 한국을 대하는 퀄컴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유일한 CDMA 베이스밴드 칩 벤더라는 지위를 내세워 한국 휴대폰업계에 고압적이다. 조직과 사고의 유연성도 퇴색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문제는 퀄컴의 이 같은 기업 문화가 비즈니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퀄컴만의 원칙을 강조한다. 시장 상황이 변하고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휴대폰 가격이 올라가도 ‘로열티 조정은 없다’라는 게 퀄컴측의 입장이다. 무조건 계약대로 하자는 것이다.
휴대폰업계 관계자들은 “퀄컴이 국내 휴대폰업체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칩이나 팔고 로열티나 받아내면 그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같은 반 퀄컴 감정은 한국이 무선인터넷 플랫폼 표준을 통일하면서 퀄컴의 브루가 아닌 선마이크시스템스의 기술을 채용한 위피로 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도 퀄컴도 득이 될 게 없다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국 휴대폰업계는 3세대(3G)에서 최강 노키아와 모토로라를 넘어야 하고, 퀄컴은 최대 GSM 칩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경쟁해야 한다. 서로의 도움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휴대폰 시장에서 노키아와 자웅을 겨루고 있는 삼성전자없이 퀄컴이 무선 칩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까. 퀄컴에 익숙한 국내 휴대폰업체들 또한 칩 벤더를 바꾸면 손해가 막대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삼성전자 고위관계자는 “우리가 빈손이었을때 퀄컴으로부터 기술도 배우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퀄컴과의 관계를 원점에서 따져봐야 할 때”라며 “국내 업체도 자생할 수 있는 힘을 많이 길렀다”고 전했다.
퀄컴은 위피에서 드러났듯 기술종속을 우려하는 한국 기업과 정부의 마음을 돌려놔야 한다. 한국에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퀄컴은 철저한 현지화를 통해 국내 업체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야 2G에서처럼 3·4G에서도 한국 시장을 독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국에 로열티를 낸다는 각오로 업체들을 포용해야 한다.
한국은 이동전화서비스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장이다. 퀄컴의 신형 칩과 솔루션의 테스트베드이기도 하다. 퀄컴은 앞으로 좋든 싫든 한국의 앞선 무선인터넷솔루션 기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연히 기술 사용료도 내야 한다. 국내 휴대폰업체의 기술 자립도도 수준도 상당히 올라갔다.
또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의 발전 속도를 따라 올 수 없다. 자칫하면 칩은 단순한 통신모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퀄컴의 ‘마이웨이’만 강조하지 말고 한국의 우수한 소프트웨어를 탑재하려는 노력도 동반해야 한다. 한국에는 휴대폰 소프트웨어 개발자만 1만명이 넘는다.
한국 휴대폰업계도 퀄컴의 우월성을 인정해야 한다. 팬택의 고위관계자는 “WCDMA칩도 퀄컴이 가장 우수하다”며 “칩 벤더중 퀄컴이 가장 앞서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단순히 로열티 몇 푼 깎기보다는 퀄컴을 통해 다른 로열티를 견제할 수 있는 윈윈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그래야 한국 휴대폰 업체들도 살고 퀄컴도 산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