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기(氣)를 살리자(16)](8)수요자중심의 R&D 지원시스템으로의 개편

(8)수요자중심의 R&D 지원시스템으로의 개편

최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원장 최영락)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행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플 수 밖에 없는 보고서를 하나 펴냈다.  ‘정부 R&D 사업의 체계·구조분석 및 정책제언’이란 제하의 이 보고서는 우리 정부의 연구개발(R&D) 사업은 체계적이지 않으며 일률적인 기준없이 중복투자되는 게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내용은 이랬다.

정부의 R&D 사업은 20개 부·청에서 211개 사업이 운영중이며 이중 산업자원부가 45개 사업, 과학기술부가 34개 사업 등을 운영한다. 사업 1개당 평균 240억원 규모로 개별 사업규모 1개가 1억원에서부터 2978억원까지 약 2900배의 차이를 보였다.

이 R&D 사업들은 부처별·기능별로 복잡해 민간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어 개선이 요구되는 것으로 지적된 것.

특히 R&D 사업 투자금액이 지속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당 연구비 규모는 투자에 비해 미미한 것으로 조사된 경우도 많았다.

프로젝트 수만 많은 이런 체계가 R&D에 직접 사용되는 비용보다 사업의 기획·관리·평가 비용만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R&D 사업의 문제점=우리나라는 미국·EU 등 선진국에 비해 R&D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질적·양적으로 연구자원들의 실질적 생산성을 높이는 일정 수준의 규모(Critical Mass)가 부족하다. 자원의 부족을 통합과 조정을 통해 연구자원들이 실질적 생산을 이루도록 하는 방안이 절실하다.

또 사업비 규모 등에서 부처별로 사업들과 하부 사업들의 수준이 맞지 않고 포괄적인 사업 성격과 목표하에 동질성이 떨어지는 다수의 하부 사업들을 담아 놓은 사업들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부처 차원에서의 체계성이 부족하고 R&D 프로그램 개념이 미흡하다.

정부의 R&D 투자자 중 정부 프로그램 기반 사업의 비중이 공공 연구기관 기반 사업의 5배 이상이다. 이같은 정부 기반 R&D 사업 비중이 큰 구조는 인건비 및 연구비 확보를 위한 과도한·무분별한 정부발주 R&D 사업 수탁활동 전개와 이로 인한 기관 고유의 국가적 임무에 부합하는 연구활동이 소홀해지는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

◇정부의 새로운 R&D 정책=최근 정부는 정부와 기업의 효율적인 R&D 투자 장려를 위해 여러가지 정책들을 선보였다. 재정경제부는 외국인 투자가들이 우리나라 R&D분야에 500만달러 이상 투자시 최대 15%를 현금으로 지원받는 정책을 발표했다.

또 기획예산처는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약 7조원에 달하는 각 부처들의 R&D 사업 예산을 종합적으로 조정·편성할 수 있도록 R&D 예산 편성권을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이양했다. 이에 따라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과학기술정책과 예산분배의 실질적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 R&D 사업의 전략적 재원분배가 강화되고 사업의 효율성이 제고될 것으로 기대된다.

◇해외 선진국 사례=미국의 연방정부 R&D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다원적·임무지향적·분권화의 경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백악관의 국가과학기술심의회·과학기술정책실·관리예산실은 연방부처간 공동사업을 중심으로 범정부 차원의 우선순위 설정 및 프로그램 조정 노력을 강화했다.

EU역시 개별 회원국가의 R&D 프로그램 중복을 최소화하고 상호 보완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며 연구결과의 보호·이전·활용 등에 우호적 사회여건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이를 통해 유럽 전체가 안고 있는 비효율성과 저성장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다.

일본은 관련사업들을 통합하는 동시에 부처 개별 메커니즘을 줄여 연구사업들의 유연성을 제고했다. 총 20개에 달하는 정부부처를 12개로 통폐합하면서 R&D에 관련된 부처를 모두 통합했고 이를 관리하는 과학기술위원회의 기능도 변화시켰다.

◇정부 R&D 사업의 개선책=선진국의 예를 보더라도 STEPI의 ‘정부 R&D 사업의 체계·구조분석 및 정책제언’ 보고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보고서는 R&D 사업을 평가할 때 부처 수준에서 개별 정부 R&D 사업들을 평가하기보다 범부처 수준의 큰 틀에서 주요 정부 R&D 사업을 종합·주기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부처별·사업별 하부사업 및 단위사업들의 연구 성격과 규모를 고려해 정부 R&D사업을 단순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각 부처들의 R&D사업들을 기획 단계에서부터 범부처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기획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효율적인 것으로 귀결됐다.

이밖에 과기부의 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산자부의 산업기술평가원(ITEP), 정통부의 정보통신연구진흥원(IITA) 등 각 부처별 정부 R&D사업 관리기관을 통합해 유사 기능을 축소하고 조직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물론 ITEP관계자들도 지적했듯이 이같은 방법이 절대적인 R&D시스템 효율화의 전범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처럼 국가적 역량을 과학기술과 R&D에 결집하려는 가운데 나온 대안이라는 점, 그리고 과기부장관이 재경부 장관과 함께 성장엔진의 책임을 맡아 추진하려는 시점과 맞물린 점 등을 감안할 때 시너지 효과를 찾을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리란 전망이다.

*성공적인 R&D 기술이전 사례 `ETRI`

ETRI는 단순한 연구개발기관이 아니다. 연구개발내용을 경쟁력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가면서 ‘국가를 먹여살릴 원천기술’이란 황금 광맥을 품고 있는 큰 줄기임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임주환)이 최근 들어 그동안 개발해온 기술이전에 공을 들이면서 벤처 성공신화에 다가선 기업들이 속속 배출되고 있다.

ETRI가 지난 76년 설립돼 만 28년이 된 현재 R&D 기술 이전 건수는 총 1595건. 이 기술을 이전받은 업체는 모두 2480여 개나 된다. 기술료로 3000억 원이 넘는 수입을 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된 기술들이 모두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성공기업을 꼽으라고 한다면 열 손가락이 남는다. 그러나 ETRI기술과 상용화에 노력한 기업들이 우리 나라 IT산업의 세계 일류화에 크게 기여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ETRI 연구원 출신이 기술이전을 통해 창업한 대표적인 기업으로 벨웨이브(대표 양기곤)를 꼽을 수 있다. 벨웨이브는 지난 99년 창업한 이동통신 및 무선데이터모듈 기술 전문 업체로 올해 코스닥 등록을 추진 중이다. 전체 인력 370여 명 가운데 73% 정도인 270여 명이 연구개발 인력이다.

이 기업은 중국 수출이 늘며 매년 100∼200%대의 높은 성장세에 힘입어 올해 매출 5500억 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매출액은 벨웨이브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지난 2월 코스닥에 등록한 빛과전자(대표 김홍만)는 광송수신모듈과 광소자부품을 주력으로 지난 2002년 매출기준 168억 원을 기록했다.

빛과 전자는 특히 광선로 사용 효율이 높은 양방향 광송수신 모듈로 세계 광관련 시장 점령에 나서고 있다. 주요 핵심기술로는 4 파장 광원과 기가비트 이더넷 폰(PON)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또 3D입체음향 전문 기업인 이머시스(대표 김풍민)는 3D음향저작 도구 ‘사운드프로’와 ‘메이븐’ 시리즈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코스닥 등록은 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 진출이 활발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최근엔 국내 이동통신사 휴대폰 모델과 일본 NTT의 자회사에 콘텐츠를 공급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LCD장비 개발업체 코닉시스템(대표 정기로), CDMA단말기 생산업체 기가텔레콤(대표 김호영), 광픽업용 회절격자를 이전받은 해빛정보(대표 박병선), 유무선 통신서비스 개발업체인 헤리트(대표 한미숙), 셋톱박스 전문업체인 임프레스정보통신(대표 박영덕) 등이 활발한 기업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