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구에 있는 부산컴퓨터도매상가의 점포로 찾아갔을 때 박종수 사장(35)은 여직원의 “부장님!”하는 소리에 맞춰 컴퓨터부품 상자 더미가 쌓여 있는 구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불렀는지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여직원의 눈짓에 ‘그때야 알겠다’는 듯 반겼다. 와이셔츠를 반쯤 걷은 채 일하던 차림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에게 호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박 사장은 멋적게 웃으며 “나이도 많지 않은데 사장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하다”고 해명했다. 그래도 사장은 사장아니냐는 지적에 “편한대로 하시라”는 배려의 말이 돌아왔다.
박 사장은 “전자유통분야에 들어온 지는 햇수로 15년”이라면서 “짧지는 않지만 내세울만하지도 않다”고 밝힌다. 그는 아직도 현장에서 일하는 게 편하다고 말한다. 독립한지 2년에 불과하고 나이도 다른 사장들에 비해 많지 않지만 경력으로는 거의 1세대 수준이다.
“고등학교만 마친 상태에서 군대를 다녀와 진로를 결정하다가 대학보다 낫겠다 싶어 이 분야로 바로 뛰어들었다”는 그의 눈에 미련이란 전혀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부심마저 엿보였다.
박 사장은 지금이야 뭐든지 잘 하는 것 한 가지만 하는 게 더 나은 시대가 됐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위험시되던 때였다고 회상한다. 전자유통 중에서도 그는 부품만을 다뤘다. 완제품 분야로 잠깐동안의 외도도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얼마 안 되는 ‘잠깐’이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서 남들은 안하는 부품만 했다”는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너무 잘 알아서 한 길만을 걸어온 모양새가 읽혀졌다.
여기에는 부산의 침체된 경기도 일조(?)를 했다. 주변의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자주 눈에 띠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이 지역 전자유통업 종사자들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고 말한다. 대부분 어려울수록 자신만을 챙기는 데 반해 이 지역 종사자들은 ‘상생의 조화’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실제 모니터나 다른 부품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가 있을 경우 주변 상점을 소개해주고 그래픽카드나 보드 등 부품을 찾는 소비자들은 조은닷컴으로 연결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같은 불경기에는 소매보다 도매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는 “별다른 전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나아가 “별다른 전략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마음이 가까와져야 하는데, 작위적인 친목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과거와 다름없이 DM을 발송하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게 비결이라고 밝힌다. “아직은 젊지 않으냐”는 패기도 행간에 드러난다.
요즘 들어서는 책임감도 느낀다고 토로한다. 큰 역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근 들어 맡은 부산컴퓨터상가 조기축구회장직은 이 같은 부담을 털어버리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마다 주변 고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는데 여기에서 상가내 선배와 후배들을 격의없이 만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 된다.
박 사장은 요즘 “가지기 위해 버려라”는 선인의 말씀을 되뇌이고 있다. 자신은 그릇이 작아서 자꾸 비워야 한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말 속에는 사장으로서, 지역 전자유통업계 나이어린 선배로서 책임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부산=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